칼로부터 아사이볼까지, 문화 춤추고 역사 녹아든 하와이 식탁의 맛 [요즘 여행]
편집자주
일상이 된 여행. 이한호 한국일보 여행 담당 기자가 일상에 영감을 주는 요즘 여행을 소개합니다.

‘하와이 음식이요? 한 그릇에 담긴 알로하죠.’
하와이의 식문화를 묻는 질문에 현지 셰프는 이렇게 답했다. 하와이어 '알로하'는 사랑, 평화, 자애 등 온갖 좋은 뜻을 다 담고 있지만 '서로 생각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하와이의 식문화야말로 이 '알로하'의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진짜 '멜팅팟'이다. 폴리네시아 원주민부터 일본, 중국, 한국, 필리핀 이민자까지, 수많은 문화가 만나고 겹치고 섞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식탁에 흔적을 남겼다.
폴리네시아에서 온 작물, 칼로


하와이 식문화의 뿌리는 하와이 제도를 처음 개척한 폴리네시아인 식생활에 있다. 이들은 카누에 몸을 싣고 광대한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들이 가져온 작물은 '카누 작물'이라고 불렸다. 오늘날에도 카누 작물은 미 본토와 하와이를 구분 짓는 핵심 요소로 남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칼로’(Kalo)다. 국내에서는 밀크티 등으로 소비되는 '타로'로 알려져 있지만, 하와이에서는 디저트 재료가 아닌 전통 식단의 주식이다. 하와이 신화에 따르면, 하늘의 신 와케아(Wākea)와 별의 수호신 호오오쿠칼라니(Hoʻohōkūkalani)의 첫째 자식이 칼로, 둘째 자식이 인류다. 인간과 칼로는 형제이자 동반자였다. 사람은 정성을 다해 칼로를 기르고, 칼로는 인간을 먹여 살렸다.
칼로는 버릴 게 없는 식물이다. 그 알줄기를 쪄서 곱게 으깬 '포이'는 하와이 음식에서 가장 전통적인 조리 형태다. 끈적한 죽 형태로, 담백하고 은은한 단맛이 특징이다. 며칠간 발효시키면 산미가 생기지만, 단맛은 줄어들기 때문에 우유나 설탕을 넣기도 한다. 전통 하와이 음식점에서는 밥과 포이 중 하나를 곁들임으로 선택할 수 있다.


칼로 잎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전통 축제 ‘루아우(lūʻau)’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식재료다. 루아우는 하와이어로 칼로 잎을 뜻하는 말이다. 축제에서는 데친 칼로 잎과 고기, 양파, 해산물 등을 넣어 뭉근하게 끓인 스튜를 만든다. 시간이 흐르며 루아우는 축제 그 자체를 뜻하게 됐다.
칼로 잎에 고기나 생선을 싸고, 다시 타이(ti) 잎으로 한 겹 더 싸서 쪄낸 '라우라우(laulau)'도 루아우의 대표 요리다. 익힌 칼로 잎은 푹 삶은 시래기와 비슷한 식감과 맛이 있어 한국인 관광객 입맛에도 잘 맞는다.
라우라우는 전통 화덕 '이무(imu)'에서 익힌다. 땅을 파고 돌을 달군 뒤 음식을 넣고 몇 시간씩 익히는 방식이다. 이무를 활용한 대표적 예는 칼루아 피그(Kālua Pig)’로, 돼지를 통째로 익혀 잘게 찢어 나눠 먹는 요리다. 장조림이나 풀드포크와 비슷하지만 수분을 가둬 천천히 익힌 덕분에 훨씬 부드럽다. 라우라우와 칼루아 피그, 루아우, 포이, 이 네 가지가 하와이 전통 잔칫상의 중심이다.


칼로에 비해 다소 존재감은 적지만 ‘울루’(breadfruit·빵나무)도 중요한 카누 작물이다. 겉모습은 작은 돌기가 박힌 두리안처럼 생겼지만, 익히면 이름 그대로 빵처럼 부드러운 식감이 난다. 과거엔 포이로 만들어 먹었고, 오늘날에는 감자칩을 대체하는 '울루칩’ 같은 간식 형태로도 소비된다.
향이 뛰어난 코나 지역의 코나 커피와 '견과류의 왕'으로 불리는 마카다미아, 산뜻한 맛의 파파야도 하와이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하와이의 아침 식탁에 빠지지 않는 하와이 파파야는 과육이 노란 품종이며 시트러스 즙을 뿌려 먹는다.
평균 미국인 대비 수산물 3배 많이 먹는 하와이안



폴리네시안 문화권답게 수산물 소비도 활발하다. 미 본토보다 1인당 연간 소비량이 세 배에 달할 정도다.
대표 음식은 단연 포케다. 초창기에는 황다랑어(아히)를 염장하고 해초와 견과류를 곁들여 먹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19세기 일본계 이민자들이 간장, 참기름, 양파, 쪽파 등을 더하면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한국이나 미 본토에서 유행하는 케일, 퀴노아가 들어간 포케는 하와이 스타일과는 다르다. 회덮밥이나 비빔밥에 가까운 한국식 포케와 달리 하와이의 포케는 샐러드, 혹은 회무침에 가까운 간결한 요리다.
마히마히(만새기)도 현지에서 즐겨 먹는 생선이다. 생물학적 분류는 붉은 살 생선이지만, 맛은 흰 살 생선에 더 가깝다. 기름지고 육질이 단단해 스테이크로 굽기 좋고, 타코에도 자주 쓰인다. 튀긴 마히마히에 매콤한 소스를 얹고 양배추와 함께 타코에 싸면, 하와이식 생선 타코가 완성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칸파치(난잿방어)'도 하와이 식탁에 합류했다. 2009년부터 하와이 수역에서 양식이 시작된 칸파치는 포케나 구이, 회, 초밥 등으로 소비되는데, 연중 수온이 일정해 1년 내내 맛이 일정한 게 특징이다.
식문화의 멜팅팟 하와이

19세기 하와이에서는 대규모 사탕수수 대농장이 조성되면서 중국·일본·한국·필리핀 등 아시아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이들이 하와이 식문화에 끼친 영향도 지대했다.
‘사이민’은 하와이의 ‘멜팅팟’ 문화를 한 그릇에 응축한 음식이다. 중식 면(에그누들)에 일식 다시마 육수를 기본으로 스팸, 어묵, 청경채 등 원하는 재료를 토핑해 먹는 소박한 면 요리다. 각국 노동자들이 남은 재료를 모아 국수를 끓여 먹던 음식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하와이의 솔푸드로 자리 잡았다. 정확한 유래는 불분명하나 확실한 사실은 20세기 중반부터는 사이민이 하와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일본 이민자들은 사이민뿐 아니라 하와이 식문화 전반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백인과 하와이 원주민보다 많은 수가 거주해 하와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유입된 까닭이다. 포케의 현대 모습이 폴리네시아와 일본 문화가 합쳐진 결과물이기도 했고, 또 다른 대표 음식인 로코모코(loco-moco)도 일본 영향을 받았다.
로코모코는 밥 위에 쇠고기 패티와 계란 프라이, 그레이비 소스를 잔뜩 끼얹어 내는 간단한 요리다. 원본 격인 '함바그'와 유사하지만 고기가 상대적으로 얇고 일본식 데미글레이즈 소스 대신 미국식 그레이비 소스를 쓰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1949년 일본계 미국인 청소년들이 주축이 된 운동 동아리 ‘링컨 레커스’가 자주 가던 식당 ‘링컨 그릴’에 ‘빠르고 저렴하고 배부른’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탄생했다. 이 청소년들이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같은 메뉴를 만들어 달라고 해 널리 퍼졌다고 한다.
‘하와이 초밥’으로도 불리는 ‘스팸 무스비’도 일본식 주먹밥 ‘오니기리’가 현지화된 음식이다. 노동 중에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주먹밥에 하와이 현지에서 인기가 높은 스팸을 덮은 것이다. 밥과 스팸 사이에는 일식 소스인 데리야키 소스를 발랐다.



하와이가 휴양·관광지로 정착한 현대에는 기존 이민자들의 영향을 넘어선 다양한 문화가 하와이 식탁에 융화되고 있다. 1993년에는 오아후 북부 '노스쇼어'의 푸드트럭에서 아메리칸-차이니스 '갈릭 시림프'가 발원했다. 밥 두 덩이에 마늘-버터에 볶은 새우튀김을 얹어내는 요리다. 현재는 하와이 어느 지역 음식점을 찾아도 주문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 처음 유입된 브라질 음식 '아사이볼'은 '포케'와 '로코모코'만큼이나 하와이를 상징하는 음식으로 떠올랐다. 본래 브라질 향토 음식이었지만 '서퍼(서핑·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이 서핑 성지로 유명한 하와이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부터 필리핀 노동자들과 함께 유입된 우베(자색고구마)도 2010년대 들어 팬케이크 재료로 재발견됐다. 기존 팬케이크보다 쫀득하고 달콤하며, 선명한 보라색도 매력적이다.

'라퍼트(Lappert's)' 아이스크림도 '필수 먹을거리'로 자리 잡았다. '하겐다즈'(15%)와 같은 고급 아이스크림보다 유지방 함량(14~ 18%)이 높은 데다 마카다미아, 코나 커피 등 현지에서 공수하는 재료로 맛을 내 하와이의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하와이 음식은 단순한 맛의 조합이 아니었다. 노동의 기억이자, 이민의 역사, 공존의 방식이다. 바다를 건너온 작물과 사람들, 그들이 남긴 풍미는 오늘도 누군가의 식탁에서 알로하로 완성되고 있다.
오아후=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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