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에어컨 제습은 켜지 말라고?

박한슬 약사·‘숫자한국’ 저자 2025. 7. 3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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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의 제습 기능을 사용하면 실내의 습기를 에어컨이 빨아들여 에어컨 내부에 물기가 고이고, 그 상태로 방치하면 에어컨에 곰팡이가 슬기 쉽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결혼 후 부쩍 살이 붙으며 더 그렇게 되었는데, 점차 푸근해지는 외모가 조바심 많은 성격을 누그러뜨리지는 않는 모양인지,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면 늘 에어컨 청소 기사부터 찾는다. 더울 때 에어컨을 못 켜는 상황이 너무 싫어서다. 한 번은 청소 업체를 불렀는데, 젊은 부부가 왔다. 두 사람은 함께 솜씨 좋게 청소를 끝내더니 대뜸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앞으로 에어컨에서 제습(除濕) 기능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기벽이 있는지라 까닭을 물었더니, 제습 기능을 사용하면 실내의 습기를 에어컨이 빨아들여 에어컨 내부에 물기가 고이고, 그 상태로 방치하면 에어컨에 곰팡이가 슬기 쉽다는 답을 얻었다. 부부가 지금껏 수백 개의 에어컨을 분해해 청소했는데, 상태가 심한 에어컨은 대부분 제습 기능을 애용하는 집이더라는 거였다. 대답조차 시원시원한 부부를 감사 인사와 함께 배웅하고, 에어컨 바람을 쐬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게 맞는 태도일까.

곱씹어 보면 애초 에어컨이란 실내의 온기와 습기를 빨아들여 사람이 쾌적하게 생활하라고 만든 기계다. 에어컨을 청소하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의 눈에야 에어컨을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는 게 가장 우선적인 목표겠으나, 덥고 습한 한국식 여름을 견디려고 설치한 게 에어컨이다. 좀 불편을 겪어도 기계를 받들고 살라는 말 아닌가. 겉으로는 타당하게 들렸으나, 실제로는 목적과 본질이 뒤엉킨 부조리극 같은 조언 아닌가!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이 얄팍한 깨달음을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꺼냈더니, 이공계 지인들이 난리가 났다. 제습 기능은 본질적으로 단열 팽창의 원리로 작동하기에 냉방 기능과 다르지 않고, 온도를 목표로 하는지 습도를 목표로 하는지만 차이가 있다며 열을 올려댔다. 내가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닌데…. 친구들아, 너희도 친구라는 존재의 본질을 잊었구나. 요즘 에어컨은 AI(인공지능) 기술까지 적용되면서 말도 잘 듣고, 비싼 안주만 골라서 집어 먹지도 않을 텐데. 어쩌면, 인문계보다 이공계가 먼저 대체되지 않을까란 슬픈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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