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최석환 기자 2025. 7. 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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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의 기억

한국군, 여성·노인·아이 등 잇단 학살
겨우 살아남아도 끝나지 않은 비극
"한국군 민간인 학살 더 잘 알려져야"
베트남 꽝응아이성 띤토학살 중 하나인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버짜이 논 학살 당시 20명이 논에서, 16명이 논 주변에서 각각 사망했다. 위령비에는 논에서 희생된 20명 이름이 적혀있다. /최석환 기자

해를 등지고 서 있으면 목덜미가 따갑다 못해 쓰라렸다. 땀은 이마와 뺨을 타고 흐르다 목덜미에 맺혔다. 옥수수밭과 대나무, 사람 키만 한 잡초가 어우러진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띤토사  토떠이촌 들판 한 가운데서였다.

불볕더위 속 도티낌리엔 씨가 이달 6일 오후 이곳 가장자리를 느지막이 걸어갔다. 1959년생, 올해 예순여섯.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띤토 학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버짜이 논 학살(36명 사망)' 피해 생존자다.

"나는 이곳에서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핏물에 얼굴을 묻고 죽은 척해 살아남았다." 도티낌리엔 씨가 마른 손으로 밭을 가리켰다. "정확히 저기, 저기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도티낌리엔 씨가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소재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주변에서 한국군이 주민들을 논으로 몬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평화롭던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 = 모든 비극은 한국군이 1966년 10월 17일 아침 토떠이촌에 들이닥치면서 시작됐다.

도티낌리엔 씨는 버짜이 논 학살로 두 남동생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집단 살해 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가 사흘 뒤 한국군 총격에 사망했다. 목숨을 잃기 직전 아버지는 들에, 어머니와 도티낌리엔 씨, 언니, 어린 두 남동생은 집에 있었다. 소를 끌고 나간 다른 언니는 밖이었다.

"어머니가 급히 방공호로 피하자고 했다. 한국군이 우리를 발견하고 나오라고 손짓했다.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했다. 뒤따르던 어머니는 뒷길로 도망쳤다. 남은 가족은 군인들에 둘러싸여 버짜이 논으로 몰렸다."

이동 중에 큰아버지 딸과 사촌 언니가 총에 맞아 죽었다. 총알이 배와 머리를 꿰뚫었다. 한 할머니가 총칼에 찔리고서 총탄에 맞는 일도 벌어졌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길목마다 군인들이 진을 쳤다.

"한국 군인들이 논바닥에 모인 주민들을 향해 '다다다다' 총을 쐈다. 두 살배기 동생을 안고 있던 언니는 팔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같은 총알에 어린 동생 팔이 뚫렸다. 언니가 내게 동생을 넘겼는데 너무 무서워서 잡고 있던 동생 손을 놔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뒤로 밀리다가 논바닥에 엎드렸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도티낌리엔 씨가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에 있는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앞에 서서 위령비에 적힌 희생자 이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최석환 기자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도티낌리엔 씨가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소재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아이 시체 밑에 숨어 목숨 부지 = 도티낌리엔 씨는 이미 숨이 끊긴 사람 틈에 파고들었다. 눈을 꼭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논이 붉은 피로 물들었고, 살짝 눈을 뜰 때면 뇌 조각이 떠다니는 게 보였다. VC(베트콩)라는 말소리를 들은 기억도 생생하다. 특히 군홧발이 흙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가까워지면 숨을 못 쉬었다."

한국군은 총격 후에 추가로 움직임이 있는 이들을 골라 확인 사살했다. "엎드린 얼굴을 확인하고 살았으면 머리에 총을 쐈다. 속으로 '내 차례면 죽겠다' 생각했다. 핏물에 범벅이 된 시체 밑에 있어서인지 내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도티낌리엔 씨는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오른쪽 이마에 총알이 스쳐 피부만 찢겼다. 같은 논에 있던 남동생 1명도 생존했다. 다만 총에 맞은 한쪽 팔은 제 기능을 못했다. 영양실조도 앓았다. 결국 1년 뒤에 죽었다.

"동생이 총에 맞았을 때 어떻게 안아야 할지 몰랐다. 안았다가 더 아파할까 봐 제대로 안아주지 못했다. 마음이 아프다. 같이 살아남았어야 했는데…."

사건 직후 도티낌리엔 씨 가족은 전략촌으로 이주했다. 먹을 것이 없던 곳이었다. 피해 당일 운 좋게 학살을 피한 어머니가 본래 살던 집에 가서 식량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사흘 뒤인 1966년 10월 20일 식량을 구하러 집에 갔었는데, 그랬다가 마을에서 한국군 총에 맞았다. 그날 집에만 가지 않았어도…."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도티낌리엔 씨가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소재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학살 현장과 30m 거리에서 생활 = 도티낌리엔 씨는 학살터와 불과 30m 거리에서 살고 있다. 형편상 멀리 갈 수 없었다.

"해 지면 혼자 바깥에 못 나간다. 어두운 길을 걷다 보면, 학살 장면이 떠오르니까. 농사도 해 지기 전에 꼭 마치고 집에 들어온다."

집 앞 학살터 한 구석에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학살 사건 현장에서 몸을 숨겼던 자리를 바라보는 곳이다. 1966년 10월 17일에만 논 안에서 20명, 그 주변에서 16명이 숨졌다. 위령비에는 논에서 희생된 20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령비가 세워진 뒤, 음력 초하루와 보름마다 작은 제사를 지낸다. 제사 때면 속으로 가족들에게 말을 건다. 우리 가족 모두 편히 쉬어야 한다고. 나도 이제 악몽도 덜 꾸고 편해지고 싶다고."

자녀들에게는 오랜 시간 학살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상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다. 위령비가 들어서고 나서야 아이들이 먼저 물었고,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냐'고 했다. 더 일찍 알았다면 아이들이 이 집에서 못 살았을 거라고 했었다. 나는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고된 삶이었지만, 살아야 했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쩐티선 씨가 지난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소재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학살 현장과 멀어지고 싶어도 선택지가 없다 = 그처럼 생존 후에도 학살터 근처에서 살아가는 이가 많다. 쩐티선(75) 씨는 버짜이 논 학살터에서 약 9km 떨어진 프억빈 마을에 산다.

그 역시 도티낌리엔 씨와 같은 현장 쓰러진 시체 틈에서 죽은 척해 목숨을 건졌다. 당시 나이 16살. 왼쪽 눈썹 위와 오른쪽 엉덩이에 총상을 입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을 잃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논에서 시체 뒤에 숨었다. 아이들 시체를 몸 위에 올리고 얼굴을 바닥에 파묻었다. 핏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그게 지금도 자주 떠오르지만 돈이 없어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있어야 가지, 더 멀리 떠날 방법이 없었다."

누우나 서나 반복적으로 생각난다. 말 못할 상처를 품고 산 시간이 반세기를 넘겼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면이 한 번씩 떠오른다. 악몽도 꾼다. 총에 머리를 맞아 죽는 꿈. 깨어나면 '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한다. 계속 안 좋은 생각을 하면 방법이 없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쩐티선 씨와 그 가족들. /최석환 기자

◇일상 무너뜨린 한국에 분노 = 쩐티선 씨는 어쩌다 TV에서 한국이 언급되면 분노가 치민다.

몇 년 전인지 몰라도 한국 사람들이 마을 위령비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주변 이들에게 "큰 매 같은 거 있으면 가서 다 때리고 싶다"라면서 격한 반응을 드러낸 적도 있다고 한다.

"화가 나서 몸이 떨렸다. 그렇다고 어디에 말할 곳도 많지 않다. 한국에 묻고 싶다. 우리의 슬픔과 한을 어떻게 할 거냐고."

한국 정부에 바라는 점을 묻는 말에는 "부모님 묘 수리를 도와줘도 좋겠지만, 안 해줘도 우리가 알아서 잘 한다"며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남편이 한 마디 덧붙였다. "한국 군인들이 본인 나라에 가서 적군만 죽였다고 말할 텐데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잘 알려야 한다.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걸."

쩐티선 씨와 도티낌리엔 씨처럼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들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있을 거라고 했다. 가까이는 학살터 곁에서, 자신이 엎드려 숨죽였던 바로 그 현장 앞에서. 말없이 참고 있을 뿐이다. 지워지지 않는 그 날을, 조용히 견디면서.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