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남해 관음포]5. 대마도 정벌의 단초, 남해 관음포 대첩
남해 사람들은 관음포를 '호국의 성지'라고 부른다. 관음포는 지금의 남해군 고현면 인근 바닷가에 있는 포구이다. 노량과 이어지는 관음포 해역은 남해군(이하 남해도)과 여수반도 사이에 복잡한 해안선과 여러 작은 섬들이 늘어 서 있다.
관음포가 호국의 성지로 불리는 까닭은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기인한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에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1598년 12월)이 실질적으로 치러지고,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 바로 관음포의 바다이다.
그런데 관음포에 있었던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을 빼놓을 수가 없다. 노량해전보다 200여 년 앞선 1383년에 벌어졌던 정지 장군의 관음포 해전이 있다.
정지 장군의 관음포 해전은 최영의 홍산대첩(1376년), 나세·최무선의 진포대첩(1380년 8월), 이성계의 황산대첩(1380년 9월)과 함께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크게 격퇴한 4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관음포 해전의 승리는 훗날 3차례에 걸친 단행된 대마도 정벌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고려 말, 왜구의 계속된 침탈
고려 말인 1350년부터 50여 년간 해안과 내륙 곳곳에 침입한 왜구는 한때 수도인 개경까지 위협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결국 1358년 고려의 공민왕은 왜구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섬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고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남해도의 행정관서가 지금의 하동군 북천면으로 옮겨졌다. 남해도는 그렇게 48년간 비워져 있다가 조선 태종 7년인 1406년에 남해현성이 축성되면서 행정관서가 복원됐다.
남해도의 행정관서가 복원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관음포 대첩이다.
홍산대첩, 진포대첩과 황산대첩 등 연이은 고려군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구는 1383년 5월, 큰 배 120여 척을 동원해 다시 한번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다.
당시 해도도원수였던 정지 장군은 왜선의 침략을 알리는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하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출동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정지 장군은 합포(마산)의 군사까지 징집해 섬진강 앞바다인 관음포에서 전열을 정비하며 왜구를 기다렸다.
왜선은 큰 배로 이뤄져 있었고, 그 규모가 고려 수군의 3배에 달하는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정지 장군은 복잡한 해안과 여러 섬이 즐비한 관음포의 독특한 지형을 활용해 왜구와 맞섰다.


◇47척으로 3배 달하는 왜선 격퇴
왜구가 큰 배를 앞세워 선제 공격해 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고려수군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고려의 수군은 기동하면서 왜선을 향해 함포를 쏘아댔다. 비록 규모에서는 열세였지만 고려 수군은 지형과 지리를 활용해 왜선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고려 수군이 적선 17척을 격파하자 왜구는 2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고려사'에는 관음포 전투에 대해, '적의 큰 배가 120척인데 1척에 강한 군사 140명씩을 태워 선봉으로 삼았다. 정지가 47척의 전선을 이끌고 나가 크게 깨뜨려 버리니 뜬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또 남은 적을 쏘니 활 시윗줄 따라 모두 거꾸러졌다. 드디어 크게 패배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웠다고 적고 있다. 정지 장군도 전투가 끝난 후 '내가 일찍이 왜선을 많이 격파한 바 있으나 오늘같이 통쾌한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압승이었다.
앞서 1380년 나세와 최무선 장군이 진포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이용해 적선을 크게 물려쳤지만, 관음포 해전은 화포를 단 함선이 기동하며 적선을 격파한 첫 전투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화포는 오늘날처럼 포탄 그 자체가 폭발하는 작열탄이 아니라 화약의 폭발력으로 크고 작은 탄환이나 화살 등의 타격체를 발사해 목표물을 부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관음포 해전은 고려와 조선의 해전 전술에 큰 변화를 예고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왜구의 근거지 밝혀…3차에 걸쳐 대마도 정벌
관음포 대첩 이후 바다를 통한 왜구의 침략은 크게 줄어들었다. 남해군 고현면 탑동마을에는 당시 관음포 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아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정지석탑(경남도 문화재자료 42호)이 서 있다.
관음포 대첩 이후 고려는 왜구 소탕을 위해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추진했다. 당시 고려와 중국의 해안 지역을 대규모로 약탈하는 왜구의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지, 근거지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관음포에서 대승을 거둔 정지 장군은 고려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왜(일본)는 온 나라가 도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대마도와 잇키섬에 근거지를 둔 일부 세력들이 우리 남해안으로 수시로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와 함께 "지금의 고려 수군은 1281년 왜 정벌 당시의 몽골군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고,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하면 손쉽게 성공할 수 있다"라며 대마도 정벌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정지 장군의 건의가 있었던 직후, 고려는 6년 뒤인 1389년 2월(창왕 1년) 마침내 박위 장군의 지휘 아래 100여 척의 전선을 동원해 제1차 대마도 정벌에 나서 왜선 300여 척을 소탕하고 귀환했다.
대마도 정벌은 총 3차에 걸쳐 이뤄졌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1396년 태조 5년에 전선 227척과 1만7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마도를 공격했다.
흔히 알고 있는 대마도 정벌은 3차 정벌이다. 조선 세종 1년인 1419년에 이뤄진 3차 정벌은 이종무 장군을 앞세워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관음포 대첩은 이처럼 왜구의 근거지를 밝혀내 그들을 정벌함으로써 더 이상 왜구가 남해안 일대에서 준동하지 못하게 한 조국을 수호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임명진·김윤관기자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 "관음포 대첩, 널리 알려져야"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관음포 해전이 대첩으로 평가받는 이유에 대해, "전투의 결과로 남해안을 침탈하는 왜구들의 활동이 실질적으로 크게 줄었고, 왜구의 본거지를 파악해 이를 소탕하는 대마도 정벌이 3차례나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라는 점을 꼽았다.
당시 고려와 중국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던 왜구는 수천, 수만의 대규모 병력으로 조직적으로 침탈해 왔다.
왜구의 정체는 지금의 일본 출신의 왜구만 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출신의 해적을 비롯해 다양한 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신 연구위원은 "1380년대 기승을 부리던 왜구가 최영, 이성계의 활약으로 내륙에서 소탕해 가고 있던 차에 바다에서는 진포에 이어 관음포에서 왜구의 해상세력을 크게 물리치면서 사실상 왜구가 더 이상 대규모로 활동하지 못하는 계기가 됐다"라고 말했다.
특히 "결정타가 된 것은 정지 장군의 건의로 시작된 대마도 정벌"이라며 "이후 왜구는 더 이상 고려와 조선을 침범하지 못하고 노략질의 시대를 끝내게 된다"고 말했다.
남해안의 중앙에 자리한 남해도는 역사적으로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최전선의 역할을 했다. 신 연구위원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남해도, 창선도에는 남해선소, 평산포, 상주포, 곡포, 미조항, 적량 등 1관 5포의 수군 기지가 있었다"면서 "남해도는 역사를 통해 볼 때 일찍부터 조국 수호 활동의 최후 보루이자 최전선의 역할을 했던 아주 특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연구위원은 "안타깝게도 관음포 대첩은 그 역사적 무게에 비해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왔다"면서 "지금이라도 관음포 대첩의 의미가 널리 제대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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