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람이 써내려가는 계절의 기록… 이곳은 ‘야생화일기’ 입니다

김희동기자 2025. 7. 2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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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가꾸던 과수원땅
7년 만에 문화공간으로
경주 민간정원 1호 지정

카페·정원·꽃집 등 구성
200여종 야생화·과실수
계절의 오고감을 알려줘

반려동물과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정원 조성 계획

손인서 대표 “자연의 위로
느림의 가치를 담은 정원
모두 쉴 수 있는 공간되길”
화덕에 피자를 굽기 위해 화덕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 모습에서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사진=야생화 일기 제공

'야생화일기'는 도서관이다. 나무와 풀, 바람과 새들이 한 권씩 펼쳐내는 자연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여름의 무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날, 경주시 강동면 한 정원에 발을 디뎠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야생화일기'. 그 이름처럼 이곳은 계절마다 피고 지는 수백 종의 야생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조용히 써 내려가는 정원이다. 풀벌레 소리, 산바람, 물소리, 그리고 사람의 발걸음이 어우러지는 이 공간은 마치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할아버지 때 과수원이던 땅이 이제는 꽃과 풀, 나무와 사람이 공존하는 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자연과 쉼이 공존하는 공간, '야생화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느림과 위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카페 본관은 넓고 탁 트인 공간으로, 자연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유리창이 넓게 나 있어 사계절의 변화를 실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사진=야생화일기 제공

▲민간정원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경주와 포항 사이, 차로 30여 분 거리의 강동면 한적한 마을. 벼가 자라는 논사이로 도시의 소음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 '야생화일기'는 자리한다. 주말이면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방문객들로 북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공기는 고요하고 느긋하다.

햇살을 머금은 야생화들이 정원 곳곳에 피어나, 자연이 빚어낸 색과 향의 조화로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진=야생화일기 제공

'야생화일기'의 시작은 손인서 씨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서울에서 외식업에 종사하며 바쁘게 살아오던 손 대표는 어느 날 문득 마음속의 공허함을 느끼고, 그 허함을 채우기 위해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조부모 대에 물려받은 과수원 땅에 꽃을 심고 가꿔온 어머니를 따라, 손 대표 역시 그 땅에 꽃을 심으며 자연과 삶의 균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절이 일곱 번 바뀌는 동안, 꽃과 함께 숨 쉬고, 흙과 함께 걸으며 삶의 결을 다시 짜 내려갔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다. 몇 송이 꽃을 심었고, 몇몇 친구들이 놀러 왔다. 그런데 하나둘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을 정비하게 됐고, 결국 정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이 공간에 '야생화일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원을 준비하던 중 서점에서 우연히 본 <소로의 야생화일기>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 따온 이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는 더 깊어졌다.

손 대표는 "식물은 계절마다 다르게 변하고 그런 모습이 마치 한 페이지씩 일기를 써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울산에서 온 최연수 씨가 촬영한 겨울 정원의 모습으로,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이 고요한 침묵 속에 서 있어 비워냄과 기다림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사진=최연수 씨 제공

2023년 경주 민간정원 1호로 등록했으며 그해 산림청 주관 대한민국 아름다운 정원 어울림 정원상을 수상했다. 산림청이 선정한 '2024년 대한민국 아름다운 민간정원 30선'에 이름을 올릴 만큼 정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점차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확대해가고 있다.

정원은 본관과 별관 카페, 꽃집, 정원길, 대구뽈찜 식당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방문객은 음료를 즐기며 계절별 야생화와 과실수, 그리고 다양한 자연의 요소들과 조우할 수 있다. 지난 26일 화덕피자 KKOSO(꼬소)를 오픈했다. 화덕에서 직접 구운 피자를 선보이며 식물 테마와 연계한 계절별 메뉴도 꾸준히 개발 중이다.

그는 "식물과 음식이 만나는 지점에도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을 테마로 한 식문화를 만드는 것도 정원 운영의 일부입니다"고 했다.
 

야생화일기의 마스코트 고양이 보름이가 한가롭게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 자연 속 여유로움을 그대로 닮아 있다.

▲정원의 철학은 '비움'과 '느림', 그리고 인연

손 대표가 추구하는 정원의 핵심 가치는 '느림'과 '비움'이다. 인공적인 구조물을 줄이고, 식물에도 이름표를 달지 않는다. 관람객이 스스로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정원, 바로 그것이 손 대표의 목표다.

정원에는 200여 종의 야생화와 과실수, 관목이 계절마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금낭화, 애기동백, 큰꿩의비름, 원추리 등 보기 힘든 식물들도 눈에 띄며,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와 곤충 소리가 이방인의 동행이 되어 준다.

울산에서 온 최연수 씨가 촬영한 봄날 정원의 모습으로, 잎을 모두 떨군 나무사이 목련이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사진=최연수 씨 제공

낯선 방문객이 정원 구석구석을 살피던 오전 11시, 여름 햇살이 꽃잎 위를 부드럽게 감싸는 그 순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두 자매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모네의 정원에서 걸어 나온 듯한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동생은 경주에, 언니는 울산에 살지만 이 정원을 좋아해 자주 만나며 계절의 변화를 함께 느끼고 그 시간을 사진으로 담아 서로의 안부를 나눈다. 꽃과 바람, 빛 사이를 오가며 쌓인 시간은 그들의 인연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며, 야생화가 피고 지는 자리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따뜻한 마음이 다시금 피어나는 순간이다. 외동으로 자란 방문객에게 그 두 자매의 모습은 더욱 부러운 풍경이었다.

최연수씨 자매가 정원 한켠에서 꽃을 찍고 있는 모습이 정겹고 따뜻하다.

울산에서 온 연수 씨는 "겨울이면 잎을 모두 떨군 나무를 보며 오히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돼요. 비워냄과 기다림의 가치를 가르쳐주는 존재이기에, 나무는 침묵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주죠"라고 말했다.

야생화일기는 단지 식물만 감상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본관과 별관에 위치한 카페와 꽃집은 그 자체로 문화 공간이자 실험실이다. 꽃집은 상업적 판매를 넘어 '식물의 새로운 쓰임'을 고민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식물 꾸러미, 식물 엽서, 미니 정원 등의 상품이 이곳에서 기획되고, 계절의 흐름과 어울리는 문화적 감성이 상품으로 재탄생된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피어난 들꽃들이 정원의 시간을 천천히 물들이고, 곳곳에 놓인 다양한 벤치가 머무름과 사색의 여백을 더해준다.

카페 곳곳,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 전시된 작품은 포항의 황정아 작가가 그린 그림들이다. 정원의 사계절과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들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봄·여름, 가을·겨울로 나뉘어 정기적으로 교체된다.

카페 별관은 작은 전시장에서는 자연을 주제로 한 상설 미술 전시가 열리며, 시각적 감상뿐 아니라 감성적인 몰입도 함께 제공한다. 이를 통해 정원은 '조용한 감성의 공간'이라는 운영 철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공간의 테마와 계절감을 우선해 작품을 선정하며, 그림마다 정원을 모티브로 하거나 계절의 정취를 담아냈다. 정원을 거닐다 잠시 그림 앞에 멈춰서는 그 순간마저도 자연 속 쉼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현재는 노키즈존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 방침은 공간을 처음 열 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손 대표는 조용한 휴식과 사색을 원하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감각을 온전히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 노키즈존 운영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야생화일기 손인서 대표.

▲식물과 사람, 반려동물이 함께하는 미래의 정원

손 대표는 최근 사람과 반려동물이 함께 머물 수 있는 정원 문화를 구상하고 있다. 단순히 반려견을 동반하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도 쉼과 배려가 깃든 자연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계획이다.

그는 앞으로 정원 내에 애견 전용 산책로, 놀이 공간, 유치원, 미용실, 병원 등 반려동물 복합문화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 모두가 어우러지는 정원. 그것이 '야생화일기'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이 정원에서는 농약도, 제초제도 쓰지 않는다. 식물들이 살아 숨 쉬는 흙을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이 들지만, 손 대표는 그 느림이야말로 이 정원이 가진 진짜 가치라고 믿는다. 손 대표는 자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한다. 억지로 꾸미거나 조작하지 않아도, 제자리를 지키며 계절을 맞이하는 식물들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온다는 것이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피어난 들꽃들이 정원의 시간을 천천히 물들이며 고요한 여름날의 풍경을 완성한다.

정원을 찾은 방문객들 역시 이 같은 정원의 철학을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무심코 지나치던 꽃 한 송이,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소리, 그 아래 쉬어가는 나비 한 마리까지. 이곳에서의 모든 풍경은 '느림'이라는 키워드로 이어진다.

손인서 대표는 '야생화일기'를 단순한 공간이 아닌 '삶의 쉼표'로 정의한다. "누구나 지치고 힘들 때가 있죠. 이곳이 그런 사람들에게 잠시 숨 쉴 수 있는 공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그가 정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자연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야생화가 피고 지는 정원, '야생화일기'. 이곳은 오늘도 계절의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 곁에서 자연과 사람이 함께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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