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4세부터 '줄 세우는' 사교육 공화국의 불편함

이지원 기자 2025. 7. 29. 17:4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이지원의 사회적 그늘 보듬記
더 불편해진 사교육 천태만상 2편
현행법상 4세 고시 막을 수 없어
이제야 학원법 개정안 발의됐지만
규제로 사교육열 잠재울 수 있나
학부모 탓하기 전 사회 구조 봐야

# 소수 정예로 운영하는 5세 대상 영어유치원(영어학원 유치부)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4세 고시'. 아직은 대치동 등 사교육열이 뜨거운 일부 지역의 이야기지만, 학부모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작지 않다. 적지 않은 학부모의 마음에 '우리 아이는 괜찮을까'란 의문을 심어주기 충분해서다.

# 우리는 '더 불편해진 사교육 천태만상' 1편에서 외신들이 주목한 한국 'Hagwon'의 민낯을 살펴봤다. 2편에선 영유아마저 줄 세우는 사교육 공화국의 불편함을 짚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사교육 규제책들이 효과를 낸 경우는 거의 없다.[사진|뉴시스]

5살 아이를 키우는 주부 A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4세 고시'를 치를 만큼 치열하진 않아요. 하지만 우리 아이 또래들이 어딘가에서 그런 교육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사교육을 해줘야겠단 생각이 들죠."

원생 감소로 매년 줄고 있는 어린이집과 달리 전국의 영어유치원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9년 615개이던 영어유치원은 2023년 843개로 37.0% 늘었다. 그만큼 어린 아이를 교육시키려는 부모들의 욕구는 '광기'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4세 고시처럼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과도한 사교육은 아동학대나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폭력이나 방임만이 아동학대가 아니라, 아이의 발달 과정에 맞지 않은 사교육도 아동학대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신의진 연세대(소아정신과) 교수는 "영유아기 감정조절 능력, 충동조절 능력, 공감능력 등을 제대로 기르지 못한 아이들은 사춘기 이후 심각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면서 "부모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교육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한국의 사교육 광풍은 외신들도 주목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3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한국의 거대한 산업이 돼 버린 '학원(Hagwon)'을 꼬집었다. "한국의 학업 경쟁이 6세 미만 아동을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면서 "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커지고, 출산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그제야 정부와 국회가 움직였다. 교육부는 지난 5월 전국 영어유치원의 4세 고시 실태조사에 나섰다. 7월 중으로 영어유치원의 레벨테스트 실태를 조사하고, 후속조치를 완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현행 '선행학습 금지법(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엔 학원에서의 선행학습을 막을 규정이 없다. 당연히 영어학원의 레벨테스트도 막을 수 없다.

지난 7월 23일 강경숙(조국혁신당) 의원이 '학원법(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참고: 강경숙 의원안에는 36개월 미만 유아동의 학원 교습 금지, 36개월 이상 학원 교습 시간 하루 40분 내로 제한, 위반 시 학원 등록 말소 및 교습 정지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사진|뉴시스] 

이뿐만이 아니다. 규제만으로는 사교육을 잠재우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부가 추진했던 사교육 규제책들이 제대로 효과를 낸 경우가 거의 없어서다.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9년 지자체들이 조례를 근거로 '학원 심야교습'을 밤 9~11시로 제한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선행학습 금지법은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4년부터 시행했지만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 지난해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는 29조20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 관점④ 숙고해야 할 대안 =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고, 궤도에서 벗어나면 실패한 것으로 낙인찍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 '사교육 광풍'을 견인하는 건 우리나라의 바뀌지 않는 현실이다. 중소기업 직장인의 월평균 소득은 298만원(통계청ㆍ2023년 기준)으로 대기업 직장인(593만원)의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주요 요건 중 하나가 여전히 '스펙'이란 점을 감안하면,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시켜서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설문조사 기관 리얼미터(교육의봄ㆍ강득구 의원실)가 실시한 '학벌 차별 관련 국민 인식 조사(2024년)' 결과를 보자. 전체 응답자의 85.2%(매우 영향 있다 42.8%+어느 정도 영향 있다 42.4%)는 "채용 시 학벌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 차별이 심각하다"고 답한 이들도 74.7%(매우 심각 32.8%+어느 정도 심각 42.0%)나 됐다.

문제는 학벌을 중시하는 문화가 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대국민 교육현안 인식조사(2024년)' 결과, 한국의 학벌주의는 앞으로도 공고할 것이란 전망이 숱했다. 전체의 48.3%는 "학벌주의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고, 34.2%는 "학벌주의가 더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현실을 내버려둔 채 부모들의 사교육열만 비판하는 건 한계가 있다. 부모들이 '사교육을 시키고 싶어서 시키는 게 아니다'는 걸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실제로 같은 조사에서 '성공한 자녀교육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26.8%가 '하고 싶은 일·좋아하는 일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답했고, 26.0%는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택했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22.2%)'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것(18.1%)'이란 응답은 후순위였다. 사교육을 시키는 부모든 사교육을 '당하는' 자녀든 한국 사회의 피해자일지 모른다는 얘기다.

육아정책연구소는 지난 4일 발간한 '영유아기 사교육, 문제와 해결 방안은?'이란 리포트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교육ㆍ사회 시스템의 개선 없이 부모의 인식과 선택을 바꾸는 덴 한계가 있다. 모든 아이들을 한줄로 세우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각자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길을 열어줘야 한다. 경쟁의 가치보다 상생의 가치를 우선하고, 어떤 일을 하든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사교육 광풍 속에 매몰된 우리 사회가 들어야 할 말이다. 과연 우리는 사교육 공화국이란 꼬리표를 떼어낼 준비가 돼 있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