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강도’ 미국과 ‘사기꾼’ 일본이 만들어낸 지옥도 [아침햇발]


길윤형 | 논설위원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22일(현지시각) 저녁 7시12분 일본과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는 소식을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음을 고백해둔다. 만만한 동맹으로부터 거액의 ‘삥’을 뜯어내려는 미국의 횡포에 맞서 한·일만이라도 공동 대응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 품었던 막연한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닷새 뒤인 27일엔 유럽연합(EU)도 미국의 무도한 요구 앞에 굴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로 인해 우리 역시 정해진 시한(8월1일) 안에 합의안을 만들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됐다. 미국이란 깡패에 맞선 ‘중견국 연대’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미·일이 각각 공개한 합의에서 가장 먼저 주의 깊게 본 대목은 자동차 품목 과세였다. 트럼프를 설득해 25%를 15%로 깎아내다니, 일본의 끈질기고 강인한 협상력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5500억달러(약 761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대미투자 금액이었다. 트럼프는 심지어 이 투자를 통해 벌어들인 이익을 미·일이 9 대 1로 나누기로 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5500억달러는 약 81조엔으로 일본의 올해 일반회계예산(115조엔)의 7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미국이 80년 전 포기했던 2차 세계대전의 배상금을 이제 와 뜯어내려는 게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액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4분의 1 정도(1500억달러)는 트럼프가 70분에 걸친 막판 협상에서 뜯어낸 금액이라고 미·일 두 나라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먼저, 미국의 설명을 들어보자.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23일 폭스뉴스에 출연해 ‘일본이 실제 투자할지 어떻게 담보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이를 매 분기 점검할 것”이라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불만을 느낀다면 다시 관세가 25%로 돌아갈 것”이라고 답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도 같은 날 시엔비시(CNBC)와의 인터뷰에서 이 5500억달러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인들의 재량에 따라 투자할 수 있는 돈”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만들기 원한다면 일본인들이 자금을 댈 것”이라고 했다. 이 방송에서도 사회자가 ‘약속의 이행을 어떻게 담보하느냐’고 캐묻자 러트닉 장관 역시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관세는 다음날 하늘로 치솟게 된다”고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얘기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어떨까. 일본의 협상 대표였던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이 26일 밤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에 나와 하는 얘길 듣고 기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문제의 천문학적 투자금에 대해 이 돈이 전부 “현금으로 미국에 가는 게 아니다”라며 이는 “우리가 설정한 상한(枠·와쿠)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미국에 투자하려는 기업에 대해 일본의 국책 금융기관인 국제협력은행(JBIC)과 일본무역보험(NEXI) 등이 출자·융자(대출)·융자보험을 제공하는 금액의 상한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9 대 1의 이익 배분율에 대해서도 “전체의 1~2% 정도일 것으로 보이는 출자”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그에 따라 일본이 잃는 금액은 기껏 수백억엔 정도”라는 인식을 밝혔다.
더 놀라운 것은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이 미-일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심연과 같은 해석 차이를 그냥 ‘방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합의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이는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며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관세율이다. 여기엔 장난질 칠 게 없으니 재확인(ピン留め· 핀으로 고정시킨다는 의미)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섣불리 공동문서 같은 것을 만들면 (작성 과정에서 미국이) 관세 인하는 이 이후에 하자고 하면 끝장이다. 문서 같은 것은 상관없다. 빨리 행정명령을 발표해 관세를 내리라고 철저히 요구할 뿐이다.” 여기까지 얘기를 들었을 때 미-일 합의(그리고 어쩌면 미-유럽연합 합의 역시)란 결국, 미국이란 ‘날강도’와 일본이란 ‘사기꾼’이 만들어낸 불가해한 합작품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언젠가 일본의 오른쪽 손모가지가 날라갈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럴지도 알 수 없다. 따라 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이대로 가만 있자니 답이 없다. 바로 이것이 트럼프가 만들어낸 새로운 지옥도, 우리가 견뎌내야 할 ‘뉴노멀’의 모습이다.
charism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이 대통령 “결론만” “직 거십시오”…최초 생중계된 68분 국무회의 어땠나
- “벌목이 산사태 원인 아니냐” 따진 이 대통령…환경장관은 엇박자
- 원청-하청노조 무조건 교섭? 실질 지배·결정권 사용자에 국한
- 특진으로 장군 된다…국방부 ‘소극적 계엄수행’ 특진 대상에 대령도 포함
- 검찰, 스토킹범 ‘기각 세례’ 논란…풀어주자 또 해치러 갔다
- IMF, 올 한국 성장률 0.8%로 하향 전망…“1분기 역성장 탓”
- 관세협상 담판길 오른 구윤철 “최선 다할 것”…이재용도 워싱턴행
- 대전 흉기 살해, 앞서 경찰 신고 4차례나…용의자 추적 중
- 김건희 오빠, 필사적으로 얼굴 가리고 ‘줄행랑’…“장모집 목걸이” 물었더니
- “빵이 넘어가?”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