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네모로 그린 ‘세계의 본질’… 기하학적 패턴 ‘세속의 추상’

박동미 기자 2025. 7. 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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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현대미술관 ‘힐마 아프…’
칸딘스키보다 앞서 작품 활동
‘추상 선구자’ 힐마 아프 클린트
대표작 139점 국내 최초 공개
■ 서울대미술관 ‘도상의 추상’
국내작가 17인 작품 180점 전시
단색화 주류 韓 추상 미술 탈피
개개인 개성 넘치는 표현법 눈길
1907년에 그린 추상회화 연작 ‘열 점의 대형 그림’ 중 ‘성인기’. 힐마아프클린트재단 제공

그림 애호가가 아니라도 교과서에서 배운 추상의 선구자 칸딘스키는 안다. 한국 추상의 계보는 잘 몰라도, 지금 미술 시장 대세가 단색화라는 건 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들여다볼 때다. 칸딘스키보다 앞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렸던 여성 화가가 있었으며, 단색화는 다양한 한국 추상의 한 갈래일 뿐이라는 걸. 때맞춰 당도한 ‘시의적절’한 전시들이 있다. 미술사를 다시 쓰게 만든 최초의 추상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를 조명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부산현대미술관)과 한국 추상을 현실에 밀착된 언어로 풀어낸 ‘도상(途上)의 추상(抽象)-세속의 길에서 추상하다’(서울대미술관)이다.

힐마 아프 클린트가 1915년에 그린 ‘제단화’. 힐마아프클린트재단 제공

◇미술사를 다시 쓴 여성화가 힐마 아프 클린트= 추상의 원류는 크게 두 개로 꼽힌다. 구상으로 시작했으나 이를 뛰어넘어 추상의 세계를 개척한 칸딘스키와 조형의 기능과 목적을 해방시켜 무(無)의 세계를 표현해낸 말레비치. 그러다 2010년대에 그동안 아무도 몰랐고, 미술사에서 배제됐던 스웨덴의 한 여성 화가가 추상의 선구자로서 발굴되며 미술사가들이 분주해졌다. 이제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선 1906년 추상화를 그린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 때문이다.

2018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미술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제목으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지 7년. 드디어 국내에서 클린트의 작품을 보게 됐다. 부산현대미술관의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은 ‘원자’와 ‘열 점의 대형 그림(The 10 Largest)’ 연작, ‘신전을 위한 그림’ 등 대표작과 드로잉, 노트 필기까지 총 139점이 공개된다. 관람객 60만 명을 기록해 뉴욕 전시 당시부터 국내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전시로, 얼마 전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선보인 후 부산에 상륙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

삶과 죽음, 정신과 물질에 관한 근원적 질문. 100년 전에 이미 클린트는 이를 예술로 표현해냈다. 당시 그는 ‘세계의 본질’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에 신지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이는 종교·철학·과학을 통합해 의식 너머의 실재를 감각할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종교 운동이다. 클린트는 1906년 ‘신전을 위한 회화’ 연작을 그렸는데, 그 계기도 영적 계시를 통한 것이었다. 언뜻 괴상하게도 느껴지지만, 사실 추상의 시작이 그러하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도 ‘영적 계시’와 비슷한 경험을 통해 추상회화를 그렸다.

클린트의 예술적 배경을 인지한 후 전시를 보면 더 새롭고 신비롭다. ‘열 점의 대형 그림’ 연작이 하이라이트. 40대 중반의 클린트는 세로 3m가 넘는 캔버스 안에 동그라미, 네모, 소용돌이, 달팽이 등을 채워 넣어 유년·청년·성인·노년기라는 인생의 네 단계를 풀어냈다. 현대미술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작품들이 당시 사람들에겐 얼마나 생경했을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는 일부 그림에 대해 “사후 20년간 열람을 금지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1300여 점의 작품과 2만6000여 쪽 분량의 기록과 함께. 100여 년 전 그림들이 오늘날 ‘소환’될 수 있었던 근원에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전시장에서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2019)을 상영 중이다.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도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클린트의 삶을 다룬 영화 ‘힐마’(2022)를 볼 수 있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

‘도상의 추상’에 출품된 박정혜 작가의 ‘Procession(행렬)’. 서울대미술관 제공

◇‘도상의 추상’으로 한국 추상 계보를 좇다= 최근 수년간 국내 화단의 중심은 단색화였다. 한국 추상 미술의 한 갈래인 단색화는 미술 시장 확장에 영향을 끼쳤고, 많은 이들을 미술 애호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문화생활의 하나로서 미술 감상이 자리 잡고,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전시가 쏟아지게 된 데에도 단색화 인기가 마중물이 됐다. 그리고, 이제 단색화 너머, 또 다른 한국 추상 미술을 들여다볼 때다. ‘보이는 것을 부정하는 예술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갇히지 않으려는 예술’이라고 추상미술을 규정하는 전시, 서울대미술관 ‘도상의 추상’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김아라 작가의 조각 ‘집합’(2016). 서울대미술관 제공

말 그대로 ‘길 위의’ 추상. 구도적이고 명상적인 세계를 좇는 단색화와 달리, 이 전시에 나온 180여 점의 작품은 모두 ‘길 위’에 있다. 세속적 사건과 감정을 바탕으로 탐구한 작품이라는 의미다. 심상용 서울대학교미술관장은 “현실에 발붙인 ‘세속의 추상’을 부각하고 싶었다”면서 “보이는 것 너머는 언제나 보이는 세계와 밀착돼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즉, 추상 미술은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근본적 탐구라는 것이다.

전시엔 1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김서울·김아라·박경률·박미나·박정혜·송은주·심우현·심혜린·안종대·양자주·이은경·이창원·이희준·조경재·조재영·차승언·최영빈 작가 등 한자리에 모인 이들의 대표작 180여 점은 ‘우리의 추상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심혜린 작가의 ‘이 점으로 붕괴’.

작가들의 독자적인 추상 언어를 찾아내 몰입하면 전시가 더 흥미로워진다. 김서울과 박미나는 회화의 물질성과 도구를 해체하며 그 존재 이유를 묻고, 김아라와 이희준은 건축과 도시의 기억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재조형한다. 박경률, 송은주, 심우현 등은 감정의 리듬을 회화로 표현했고, 안종대, 양자주 등은 차곡차곡 쌓은 시간의 층위를 추상의 물성을 통해 조망한다.

전시는 한국 추상의 계보에 대한 탐사이면서, 동시에 추상에 대한 단편적 시각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다. 심 관장은 “눈에 보이는 한계를 넘어선 진리를 감각하고, 동시대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살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9월 14일까지.

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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