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92] 한겨울의 눈덩이 좌판

1983년 초, 눈보라가 한바탕 몰아치고 잦아든 다음 날. 뉴욕 거리 한 모퉁이에 미술가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1943~)가 좌판을 벌였다. 알록달록한 천 위에 상품이랍시고 내놓은 물건은 둥글게 뭉쳐 만든 눈덩이들. 크기 순서로 나란히 진열한 걸 보니, 클수록 값이 비싼 모양이다. 혹 요즘 같은 무더위라면 반갑게 팔아 줄 수 있으련만, 잔설이 곳곳에 나뒹구는 한겨울에 눈덩이를 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해먼스는 아프리카계 홀어머니 아래서 여러 형제와 가난, 차별을 밥 먹듯 겪으며 자랐다. 캘리포니아 오티스 미술학교에서 흑인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사실주의 화가 찰스 와이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1974년 뉴욕으로 이주한 다음에는 회화와 같은 전통적 매체를 거부했다. 대신 술병과 흑인 이발소에서 수집한 머리카락, 먹고 남은 닭뼈처럼 실제로 흑인들의 몸과 삶에서 떨어져 나온 온갖 비루한 것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다.
사진 속 해먼스는 거리에 늘어선 여느 불법 노점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월가를 중심으로 금융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뉴욕에서 금방 녹아 사라질 눈덩이에 정성껏 값을 매겨 판매하는 행위란 자본과 금융의 세계에서 ‘가치’가 무엇인지 신랄하게 하는 질문이다. 유난히 흰 눈덩이들은 월가의 백인들과 노점의 흑인들로 나뉜 세계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해먼스는 이후 흑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대표적 미술가로 각광받으면서도, 갤러리에 전속되기를 기피하고 부유한 컬렉터들이 모이는 개인전의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천대받는 초라한 삶이 예술의 주제라면 작품 또한 미약하고 비천해야 ‘사실주의’라고 믿는다. 그는 누구보다 진실하게 살려 애쓰는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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