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86] AI와 기술 민족주의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기술입국(技術立國)‘이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국가 주도의 기술 개발로 산업화와 국익을 달성하려는 정책 모토였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 주도로 기술 입국을 추진했고, 통산성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이후 한국과 대만이 같은 전략을 계승했다. 기술 입국론은 냉전기 미·소 기술 보호주의에 조응하는 아시아판 기술 민족주의(techno-nationalism)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기술 협력과 인적 교류를 중단하고 자국의 안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을 독점했다. 아시아 국가들 역시 전후 재건과 세계 시장 경쟁, 공산권 견제를 위해 유사한 전략을 택했다.
기술 민족주의를 연구한 일본의 과학사학자 나카야마 시게루(中山茂)는 1980년대 이후 한국과 대만이 점차 기술 세계주의(techno-globalism)로 전환했다고 평가한다. 한국·대만에서는 민간 기업과 다국적 협력이 기술 개발을 주도했고, 국경을 넘는 흐름이 확대됐다. 반면, 불황과 기술 격차 우려 속에 일본은 1995년 이후 기술 민족주의로 회귀했고, 나카야마는 이 회귀가 일본 경쟁력 약화의 결정적 이유였다고 평가한다. 기술의 본질은 지식과 사물의 초국가적 흐름이기에, 폐쇄적 정책은 본질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소버린 AI’ 정책은 국가의 AI 주권을 강화하고 외국 기술 의존을 줄이려는 전략이다. 그런데 이 접근은 AI 개발을 국가 간 경쟁으로만 바라보며, 기술의 개방성과 윤리보다 국익과 안보 논리를 우선한다. 특히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국경을 초월해 작동하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AI를 국경 안에 가두려는 시도는 그 실효성이 의문스럽다.
결과적으로 AI가 직면한 보편적인 윤리와 책임에 대한 국제적 공론장에 적극 참여하기 어려워질 위험이 있다. 소버린 AI는 기술 민족주의의 21세기 버전이다. 정책 입안자들은 기술 민족주의를 고수하다가 국가 경쟁력이 약해진 일본의 교훈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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