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여자 일 아냐” 편견 맞서 취업…1980년 역사의 소용돌이로

한겨레 2025. 7. 2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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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gb(0, 184, 177);"><strong>[길을 찾아서 - 유숙열 1세대 페미니스트의 웃자! 놀자! 뒤집자!]
3화 언론탄압 목격한 합동통신 시절</strong></span>
한의원이던 집에 배달된 온갖 신문
‘세상 향한 창’ 신문에 각별한 애정
고교 장래희망도 신문기자 꿈꿔
친척들 “여자는 교사 해야” 충고
반박 못 했어도 기자 꿈 그대로
1976년 언론사 ‘합동통신’ 입사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어판’ 창간
10·26, 12·12, 5·18에 뒤통수 맞은듯
고 김태홍 선배 만나 ‘언론자유’ 눈떠
1978년 10월 한국어판 리더스다이제스트 창간 파티에서 필자(둘째 줄 왼쪽 세번째)가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자 제공

나는 어려서부터 신문을 많이 읽었다. 우리 집은 한의원을 운영하다 보니 온갖 신문이 다 들어왔다. 이를테면 조선·동아·한국일보 같은 신문은 물론이고 지금은 없어진 신아·대한일보 등도 들어왔고, 아이들을 위한 소년한국일보도 배달됐다. 심지어 전문지인 약업신문도 들어왔다.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은 8할이 신문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신문은 나에게 세상으로 난 유일한 창이었다. 나는 신문을 읽으며 세상을 배웠고 거기 연재되는 소설들을 읽으며 역사(?)도 배우고 연애(?)도 배웠다.

물론 당시의 신문들은 한자가 많이 쓰여서 기사는 띄엄띄엄 건너뛰며 읽고 한글로 쓰여진 만화와 신문 연재소설들을 우선적으로 찾아 읽기는 했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가 김광주씨의 ‘비호’가 나의 첫 무협소설이었고 그 외에도 신문마다 연재되던 역사소설과 연애소설들은 나의 주된 문학수업의 장이 되었다. 어느 신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오의 연정’이라는 로맨스 연재소설을 열심히 봤던 기억이 있다. 키스신을 묘사할 때는 그 아리송하고 간질간질한 느낌 때문에 몇번이고 다시 읽었던 기억도 난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고바우 영감’,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블론디’ 만화 등도 열심히 보았던 잊지 못할 추억이 서린 만화들이다.

고교시절 어느 날 내가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자 집에 가득 모여 있던 친척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기자? 그건 남자들이 하는 일이야. 여자가 무슨 기자를 해?”라고 핀잔주듯 말했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외삼촌은 “그건 깡패나 사기꾼 같은 일이야. 여자가 할 일이 못 돼. 여자는 교사나 뭐 그런 일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 말에 반박할 만큼 기자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내 뜻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의 길도 신문광고를 보고 찾았다.

대학을 졸업한 1976년 봄 나는 서점을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내외출판계’(?)라는 잡지 창간을 위해 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모했다. 그런데 합격 통지를 받고 출근을 해보니 나는 기자직이 아니라 사장 비서실로 발령이 난 상태였다. 정말 황당했다. 당시의 나는 기자가 아닌 비서가 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항의를 했더니 어찌저찌 상황이 흘러 나는 며칠 만에 출판부로 다시 발령이 났다. 출판부로 가니 거기에는 백지광고 사태로 해고된 동아투위 기자들(1975년 결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기자들)이 주간, 편집장을 맡고 있었고 또 그들의 동료 해직 기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내가 처음 만난 기자 선배들은 그렇게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쫓겨난 해직 기자들이었다. 그로부터 몇년 후인 1980년 내가 바로 해직 기자가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당시 출판부에는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그는 고졸 사원으로 경력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한달이 지나 그와 월급을 비교해 보니 지금은 그 액수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가 받는 돈은 너무 적었다. 그래서 또 항의를 하며 이유를 물어보니, 수습 기간이라 월급이 적은 것이니 석달만 기다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석달이 지나고 넉달째 월급을 받았을 때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난 깨끗이 마음을 접고 그 길로 거길 관뒀다. 나중에 듣고 보니 사장이 그렇게 단번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간 내가 인상적이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얘기를 선배한테 들었다.

넉달 만에 첫 직장을 때려치운 나는 다시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다가 합동통신사에서 미국 잡지 한국어판 창간을 위해 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다시 응시했다. 영어 번역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 합격을 하고 들어가 보니 한국어판을 창간한다는 그 잡지는 미국의 월간지 ‘리더스다이제스트’였다. 당시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행되는 인기 잡지였고 우리는 그 잡지의 한국어판을 발행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이 일하게 된 동료들은 나보다 모두 선배였지만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또한 합동통신사는 메이저 언론사였기 때문에 비서실 발령 같은 황당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좋았다. 무엇보다 여자 선배들이 많은 것이 좋았다. 국어교사를 하다가 들어온 조주옥, 송정애 선배 그리고 소설가 김광주씨의 딸이면서 동시에 한국일보 기자이자 소설가인 김훈씨의 여동생이기도 한 김용씨, 그리고 나와 동년배인 막내 김화란씨까지 우리 모두는 무적의 다이제스트 5인방이 되어 똘똘 뭉쳤고, 즐겁고 재미나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 부서는 월간지, 그것도 미국 잡지를 번역해 만들다 보니 매일 국내 뉴스를 다루는 통신이나 신문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런데 나에게 국내 뉴스에 눈을 돌리게 만든 대형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1979년 10·26 사건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5·16 군사 쿠데타가 났기 때문에 대통령이라고는 박정희밖에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 박 대통령이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한테 총을 맞고 죽은 것이었다. 그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던 나에게 철퇴를 가한 그 사건은 내 영혼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내가 준엄한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처음으로 들었고 그 역사 속에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10·26 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서울의 봄’이라 이르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명칭인 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26일부터 1980년 5월17일 사이에 전개된 민주화운동 시기를 말한다. 10·26 사건 이후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에 합의하여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팽배했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그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학생들은 1980년 봄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에 저항하며 일어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1980년 5월 검열 거부 운동을 빌미로 해직된 언론인들이 89년 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강제해직 진상 규명과 원상회복’을 외치고 있다. 1980년 당시 한국기자협회장이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된 김태홍 전 국회의원(앞줄 가운데)도 시위에 나섰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 역시 심각한 사회적 고민에 빠져 있던 중에 1980년이 되었고, 그해 1월께 합동통신 외신부에 있던 김태홍 선배가 우리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김 선배의 다이제스트 발령은 좀 이례적인 것이었다. 촌지 거부운동이나 독서클럽 등의 모임을 이끌며 젊은 기자들한테 신망이 높던 김 선배는 한국기자협회장 선거에 나설 것을 밝혔는데 회사에서는 그에 반대하여 정치색이 옅은 여기자들만 있는 다이제스트부로 좌천성 발령을 낸 것이었다. 당시에는 기자가 기자협회장 선거에 나간다는데 반대를 하는 회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김 선배는 나보다 12년 선배였는데도 우리 부서 데스크 자리가 아니라 평기자 자리인 내 옆자리를 배정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김 선배가 사직서를 쓰고 나가기 전까지 두달 동안을 나란히 옆에 앉아 일했다. 그리고 그 두달 동안 나는 김 선배의 열혈 지지자가 되었다. 내가 김 선배 때문에 깨진 편견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라도라는 지역에 대한 편견이었다. 김 선배가 바로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이천에서 살면서 어린 시절 ‘전라도 사람’에 대한 편견 어린 말을 많이 들었던 나는 그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김 선배를 통해 깨달았다.

하여튼 김 선배는 본인이 밝혔던 대로 기자협회장 선거에 나가 1980년 4월에 20대 한국기자협회장이 되었다. 선거에 나가면서 후배들은 휴직원을 내라고 했지만 회사에서는 사직서를 요구해 선거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고 회사를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태홍 선배는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신념, 추진력까지 모든 것을 갖춘 훌륭한 언론계 선배이자 지도자였다. 기자협회장이 되자 김 선배는 바로 기자협회 사무실에 상시적으로 드나들던 정보 기관원들을 출입금지 시키고 매일 등사기를 돌려 보도통제되는 각종 뉴스들을 세상에 알렸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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