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트라우마’ 17년 만에 부활?…관세 협상에 첫 당정 균열 조짐
농민 “생존권 말살”, 여당도 제동…외교 실리와 정치 리스크 사이 갈림길
(시사저널=정윤성 기자)

한미 관세 협상 마감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농축산물 시장 개방이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확대에 대한 미국 측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농축산업계의 반발이 격화하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정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정부와 여당 간 뚜렷한 이견이 드러나면서 협상의 실익뿐 아니라 정치적 파장까지 감안해야 하는 이재명 정부 통상 외교가 고비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28일 대통령실 등에 따르면, 미국 측은 관세 협상과 관련해 농축산물에 대한 시장 개방을 한국 측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한 현안 브리핑에서 "미국 측의 압박이 매우 거센 건 사실이다"며 "구체적으로 농축산물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보 폭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 25일 대통령실이 관세 협상 범주에 농산물이 포함됐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이와 관련된 미국 측 요구가 있다는 점을 공식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구체적인 협상 항목이나 진척도는 밝히기 어렵다는 게 대통령실의 입장이지만, 미국은 쌀 수입 확대와 함께 현재 30개월령 이하로 제한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기준 철폐하를 핵심으로 사안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정부는 쌀과 소고기 시장의 추가 개방은 협상 카드에서 제외할 방침이었다. 대신 바이오에탄올용 옥수수 등 비식량용 작물 수입 확대, 위생검역 조건 완화 등을 대안으로 검토해왔다. 하지만 호주와 일본 등 협상을 마친 주요국들이 쌀·소고기 개방을 카드로 협상을 타결한 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를 언급하며 한국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통상 당국이 미국 측의 농수산물과 관련된 요구를 회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의 농축산물 시장 상황은 다른 국가와 차이가 있다. 쌀의 경우 한국은 저율관세할당물량(TRQ)을 미국과 중국, 호주, 태국, 베트남 등 5개국에 적용하고 있는 탓에 미국 몫을 늘리기 위해선 세계무역기구(WTO)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통상절차법에 따라 국회 비준도 필요하다.
소고기의 경우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광우병이 발생한 날부터 5년이 지나지 않은 국가산 30개월령 이상 쇠고기는 수입 금지 품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제품을 반입하려면 국회 심의를 받아야 한다. 2008년 '광우병 사태'로 인해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불신이 커지며 전국적인 집회가 일자 당시 야당이던 통합민주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의 요구로 마련한 법 조항이다. 일단 농축산물 시장을 추가 개방하기 위한 국내외 제도적인 문턱부터 높은 셈이다.

여당·농민 반발에 '진퇴양난'
더 큰 문제는 관세 협상이 당정 갈등의 쟁점으로 비화할 가능성까지 보인다는 점이다. 협상 품목에 농축산물이 포함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당 의원들까지 반발하고 나섰다. 지난 26일 농해수위 민주당 의원들은 공동성명서를 내고 "농업을 통상 협상의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금의 상황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쌀을 포함한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 검역 완화, 수입 규제 축소 등 국민 먹거리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가 협상의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정부가 한미 통상협상에서 우리의 식량 주권과 국민 먹거리 안전을 철저히 수호하는 자세로 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며, 국민과 함께 우리 농업과 농민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정부와 여당 간 공식 입장 차이가 처음 드러난 사례로, 관세 협상이 당정 갈등의 발화점이 되는 모양새다.
농축산업계의 반발도 격화하고 있다. 이날 한국농축산연합회 등 농축산업 단체들은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은 곧 농민 생존권 말살"이라며 "전국농축산인은 식량주권 사수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특히 광우병 사태 당시 시장 개방 이슈가 정치 쟁점으로 번지며 정부 지지율을 짓눌렀던 점을 고려하면, 이재명 정부로선 딜레마 상황에 놓였다는 평가다. 광우병 사태 당시 이명박 정부 지지율은 취임 2개월 만에 20%대로 폭락했고, 결국 정부는 미국과 소고기 협상을 일부 재협상했다. 이재명 정부 역시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동시에, 농축산업계의 반발과 여론의 우려를 설득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은 셈이다.
당시 야당으로 거센 투쟁에 합류했던 민주당이 이번엔 여당으로서 정부와의 이견을 어떻게 풀어갈지도 주목된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제한 완화 등이 현실화할 경우 향후 당정간 조율 역시 정부의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농해수위 여당 관계자는 이날 대통령실 현안 브리핑과 관련해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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