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서 영어 쓰면 곧 부끄러워질 것”… 300년 英語 아성 흔드는 모디 ‘힌디어 우선주의’

유진우 기자 2025. 7. 2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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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억 인구 대국 인도에서 영어와 힌디어를 사이에 둔 언어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도인민당(BJP)이 10년 넘게 ‘힌두 민족주의’를 앞세워 힌디어 사용을 강조하면서 300년 이상 공용어 지위를 누려온 영어는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모디 총리 최측근인 아미트 샤 내무장관이 “(인도에서) 영어로 말하는 사람은 곧 부끄러워질 것”이라고 발언한 이후 논란이 정점으로 치닫는 중이다.

27일(현지시각)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샤 장관은 최근 한 공식 석상에서 “우리나라 언어는 곧 우리 문화의 보석”이라며 “영어를 쓰는 것이 부끄러운 사회가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말했다. ‘식민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도 사회는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에 다시 휩싸이는 모양새다.

2022년 8월 인도 암발라에서 영어 능력시험과 비자 컨설팅을 제공하는 기관에서 실시하는 국제 영어 시험 시스템(IELTS) 수업에 참석한 인도 학생들. /연합뉴스

인도에서 영어는 17세기 영국 동인도회사가 상륙한 이래 지배층 언어로 3세기 넘게 군림했다. 19세기 영국 정치인 토머스 매콜리는 “피와 색깔은 인도인이지만, 취향과 지성은 영국인”을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인도계 엘리트 계층을 위해 영국식 영어 교육 과정을 도입했다.

이 정책은 역설적으로 인도 독립과 그 이후 경제적 성장을 이끄는 동력이 됐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가 대표적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구글 순다르 피차이, 마이크로소프트 사티아 나델라 등 글로벌 빅테크를 이끄는 인도계 최고경영자(CEO)들 성공 배경에 영어가 자리 잡고 있다.

구글 CEO 순다르 피차이(가운데)가 2025년 5월 20일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서 열린 구글 연례 I/O 개발자 컨퍼런스를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모든 인도인이 영어를 잘한다’는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 2011년 인구조사를 보면 의외로 인도 내 영어 구사자는 전체 인구 가운데 10% 수준에 불과하다. 인도에는 지역 방언을 합쳐 780개가 넘는 언어가 공존한다. 전문가들은 영어가 인도에서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는 연결 언어(lingua franca)로 국가 통합에 기여했다고 했다.

반면 힌디어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체 인구 44%가 사용하는 제1언어다. 모디 정부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인도인 10명 중 9명이 영어를 못 쓰는 현실에서, 영어가 계층 이동 사다리 역할을 하며 극심한 사회 불평등을 야기한다고 꼬집었다.

모디 총리는 집권 초기였던 2014년부터 “인도는 1200년 넘게 노예 근성으로 고통받았다”며 민족 정체성 강화를 내세웠다. 이후 정부 공식 문서와 소셜미디어에 힌디어 사용을 장려했다. 2023년 인도 수도 뉴델리서 열린 G20 정상회의 초청장에는 국가명을 ‘인디아(India)’ 대신 산스크리트어 ‘바라트(Bharat)’로 표기했다. CNN은 전문가를 인용해 “인도 인구 80%에 달하는 힌두교도를 결집해 북부 ‘힌디 벨트’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라고 분석했다.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연합뉴스

힌디어 우선주의 정책에 비(非)힌디권 지역 반발은 거세다. 이들은 힌디어 강조가 ‘힌두 제국주의’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야당 지도자 라훌 간디는 샤 장관 발언 직후 소셜미디어 X에 “영어는 장벽이 아니라 다리(bridge)이며, 수치가 아니라 힘”이라고 비판했다.

언어 갈등은 실제 폭력으로 번지고 있다. 최근 금융 중심지 뭄바이에서는 열차 승객이 이 지역 방언 마라티어 대신 힌디어를 쓴다는 이유로 폭행 당하는 영상이 퍼졌다. 남부 타밀나두주에서는 초등학교 제3언어로 힌디어를 의무화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인도 최남단 지역으로 스리랑카와 가까운 이 지역에서는 88% 인구가 타밀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

힌두교 신도들이 2025년 7월 24일 인도 남부 첸나이에서 조상 영혼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힌디어 우선주의가 인도가 품은 문화적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쇼카 대학 리타 코타리 영문학 교수는 CNN 인터뷰에서 “정부가 남부 지역 언어적 자부심을 직접 건드릴 수 없으니, 영어를 희생양으로 삼았다”고 했다.

학계에 따르면 영어와 힌디어 대립 구도 속에서 수많은 인도 내 토착 언어는 사라지고 있다. 유네스코(UNESCO)는 인도 내 약 200개 언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했다. 인도 인민언어조사(People’s Linguistic Survey of India)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220개가 넘는 지역 방언들이 자취를 감췄다. 동부 자르칸드주 출신 작가 알로카 쿠주르는 “영어와 힌디어가 확산하면서 우리 부족 언어였던 쿠루크어는 설 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인도 남부 벵갈루루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술 기업 와이프로 최고운영책임자(COO) 아밋 촌두리, CEO 티에리 델라포르테, 최고재무책임자 아파르나 아이어, 최고인사책임자 사우라브 고빌 등이 2024년 1월 분기 실적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모디 정부가 10년 내내 보여준 강력한 의지에도 인도 내에서 영어는 여전히 세계 경제와 이어주는 연결고리이자,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언어’로 쓰이고 있다. 영어는 여전히 인도 노동 시장에서 실질적인 소득 격차를 만들어내는 핵심 변수다. 독일 노동경제학연구소(IZA) 연구에 따르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도 남성은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남성에 비해 시간당 임금이 평균 34%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역시 22% 더 높은 영어 프리미엄을 누렸다.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은 최근 보고서에서 “인도 젊은이들에게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라 사회적 상승(upward mobility)을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로 인식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보고서는 “하향식(top-down) 정부 정책과 시민들의 상향식(bottom-up) 경제적 열망이 충돌하는 간극을 좁히지 않는 한 영어가 가진 위상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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