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레 사마천『사기』를 거론하는 까닭은?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또는 가장 많이 듣거나 읽은 책은 뭘까? 구체적인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삼국지』와 『손자병법』, 그리고 『사기』가 아닐까? 워낙 친근하여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듯하나 사실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삼국지』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가 읽는 『삼국지』는 서진西晉 시대 사학자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가 아니라 원말 명초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연의三國演義』이다. 그러니 소설 『삼국지』를 읽었다고 한다면 틀린 말이다. 『손자병법』은 어떤가? 아마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삼십육계 줄행랑이 아닌가싶은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는 패배를 최소화하는 전략인 「패전계敗戰計」의 하나로 상대가 막강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도주하는 것이 그나마 상책(走爲上計)이란 의미이니 사실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다. 그럼 사마천의 『사기』는 어떤가? 혹여 우리가 잘 모르거나 또는 잘못 아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대작이라는 명성, 블록버스터의 서라운드 사운드에 압도되거나 심취되는 바람에 놓쳐버린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마담과 사마천의 합작품 - 『태사공서』
원래 사기史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서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작물을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으며, 반고는 『한서』에서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불렀다. 동한 말년에 사마천의 저작을 『사기』라고 칭하면서 다른 사서에는 더 이상 '사기'라는 명칭을 달지 않았다. 비로소 『사기』의 진가를 알게 된 셈인데, 사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작물을 명산에 비장秘藏하고 부본을 경사京師에 두어 후세의 식자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으니 출간하여 널리 알린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데 몰두했을 따름이다. 심지어 그가 『사기』를 완성한 후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는 것을 보면 만년이 심히 쓸쓸했던 것 같다.
그의 소임은 바로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이 편찬하고 있던 사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사마담은 무제 시절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사서 및 나라의 전적을 편찬하는 직분인 태사령太史令으로 있으면서 사서 편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천문을 다루는 관리(掌天官)로서 마땅히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10년) 한무제가 직접 주도한 봉선 의식에 참가하기를 기대했으나 참가할 수 없었다. 이에 울분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봉선을 행하던 바로 그 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사서 편찬은 이제 시작인데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희망은 오직 하나 아들 사마천 뿐이었다.
"내가 죽은 후 너는 반드시 태사령의 임무를 이어받아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사서를 찬술하고자 했던 바를 잊어서는 안 된다. 무릇 효란 부모를 모시는 것에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데 이르고 마지막으로 몸을 세우는 데에서 끝이 난다. 입신하여 후세까지 명성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이다.……지금 한漢이 일어나 해내海內가 통일되었는데 수 많은 밝은 군주와 현명한 임금, 충신과 의에 삶을 내놓는 선비들이 있으되 내가 태사령으로서 이를 논하여 기재하지 못하고 천하의 역사 문장을 폐하게 되었으니 내 심히 두려워하는 바이다. 너는 이를 반드시 명심하여라!"(『사기』, 「태사공자서」)
실제로 『사기』에는 「논육가요지論六家要旨」를 비롯하여 적어도 7군데 내지는 8군데에서 사마담이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객열전刺客列傳」,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번력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등등이 그것이다.(거자오광 저, 졸역, 『중국경전의 이해』, 중문, 1996. 205~208쪽)
궁형宮刑
사마담은 사마천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직무를 아들이 계승하기를 원했다. 그런 까닭에 섬서성 동부 황하 서안西岸에 자리한 한성韓城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열 살 무렵부터 『춘추좌전』, 『국어』, 『세본』을 비롯하여 제자백가의 책들을 읽게 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아들을 대동하고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전후 3차례) 직접 체험하고 느끼도록 하였다. 스무 살 무렵 경사인 장안 근처로 이사한 그는 당대 석학으로 제자백가의 학설을 타파하고 오로지 유가의 학술만 존중하기를 요구한 동중서董仲舒와 당시 유행하던 금문경학 대신 고문경학을 주창한 공안국孔安國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도가 학설을 신봉한 부친에게는 도가와 황로학黃老學을 배웠다. 그는 낭중郎中으로 입사하여 28세에 무제 유철劉徹을 직접 배알한 이후로 무제의 지방 순시 때마다 수행하였으며, 무제의 명에 따라 파촉巴蜀 이남의 서남이 지역(지금의 사천성, 귀주성, 운남성)에 파견된 적도 있었다. 이렇듯 그리 대단치 않은 사관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마천은 자신의 재능과 경륜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역린逆鱗은 용의 턱 아래 역방향으로 난 비늘인데, 그것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화를 낸다고 한다. 물론 가당치 않은 전설에 불과하나 이를 빗댄 군주의 분노는 실제로 자주 있는 일이다. 전한의 제7대 황제 무제는 기원전 141~87년까지 자그마치 54년 1개월 동안 재위했던 인물이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유술儒術을 존중하되 법치도 중시한 영리한 황제로 국력을 강화하여 강역을 넓혀 진정한 의미의 통일제국을 완성했다. 그는 인재를 중용하여 조정의 관리로 적극 활용했으며, 문화를 중시하여 악부樂府를 설치하고 문사들을 중용했다. 하지만 총애의 주체는 황제이지 상대가 아니었다. 황제에게 신하는 탁월한 문사 사마상여가 일개 배우俳優로 취급받은 것처럼 그저 종복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마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흉노를 치러갔다가 중과부적으로 투항하게 된 이릉李陵을 변호했던 사마천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난데없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무제의 또 다른 면모, 사치스럽고 과시욕이 심하며,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하고 제위에 올라 의심이 많고, 오랜 권력의 정점에서 두려워할 것도 하지 못할 것도 없는 이른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최고 통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돈도 없고 빽도 없었던 그는 죽음을 대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궁형을 택하고 잠실蠶室로 들어갔다. 그 까닭에 대해 그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편지글(「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러한 재난을 만나 거듭 향리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님을 욕되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산소 앞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년의 세월이 흐른다할지라도 저의 수치는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이로 인해 창자가 하루에도 아홉 번씩이나 구비치고 집에 있으면 홀연 마치 무엇인가를 잊은 듯하고 문밖을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땀이 흘러 옷이 적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발분저서發憤著書
맹자는 「고자상」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우환憂患 가운데에서는 살아나고 안락함 가운데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知生於憂患, 死於安樂)."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사마천이 맹자의 말을 상기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죽임을 당하지도 죽음을 택하지도 않는 대신 치욕을 씹어 삼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발분하여 "고금의 변화 궤적을 분명히 밝히고, 하늘과 인간의 미묘한 관계를 고찰하여" 마침내 "사가로서 독창적인 체계와 내용을 담아 일가의 문사文辭를 완성하였다."(通古今之變, 究天人之際, 成一家之言. 「보임안서」)
이른바 발분저서發憤著書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사기』는 이렇듯 편찬자인 사마천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발분저서, 사서 자체의 방대한 분량과 체제, 문학성이 가미된 문체, 문헌과 현지 탐사의 결합, 그리고 절대적인 후세 영향 등으로 인해 필독의 역사서가 되었다.
「오제본기五帝本紀」와 「조선열전」
『사기』는 본기, 세가, 열전, 표, 지 등으로 나뉜다. 본기는 「오제본기」에서 시작되어 12번째 한 무제에 관한 「효무본기孝武本紀」에서 끝나고, 열전은 「백이열전」에서 시작하여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끝난다. 다만 「태사공자서」가 붙어 전체 70편이다.
사마천은 오제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을 선택했는데, 이는 지금의 산동에 자리했던 제齊, 노魯의 현지 학자들이 전국 시대 이후, 특히 한 무제 시절의 대일통 관념에 기초하여 정리한 책으로 알려져 있는 『세본世本』과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오제덕五帝德」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오제의 등장은 당연히 오방이나 오미, 오장 등 오행설의 영향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춘추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오제 가운데 한 명인 황제가 『시경』이나 『상서』에 언급되지 않았으며, 『오제덕』에 공자와 제자인 재아의 대화에 나오기는 하지만 정작 『논어』에는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요와 순, 하우와 상탕, 주문왕과 무왕, 그리고 주공을 언급했을 뿐 오제에 대해 언급한 바 없다. 요순보다 앞서는 전설상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오제를 꺼내들은 것일까? 아마도 사마천이 살았던 무제 시절의 대일통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싶다. 사마천은 동중서에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웠으며, 이를 통해 대일통大一統 사상을 습득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간에 전설이나 신화 속의 황제를 인간화함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남의 나라 역사가 오제에서 시작되든 그보다 앞서 삼황부터 시작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한나라가 조선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급기야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하니 남월, 동월, 서남이, 흉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외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항목인지라 별도의 장을 마련한 것 또한 당연하다. 문제는 사마천의 「오제본기」가 5천 년 중국역사의 시작이자 염황자손炎黃子孫의 시발점이자 중화주의의 토대라는 점, 그리고 「조선열전」이 고조선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서 기록이긴 하나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고조선의 본래 역사의 전모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대에 고조선과 요동의 경계에 있다는 패수浿水와 관련하여 설왕설래를 낳아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았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 과연 어디인지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에게 조선은 변경의 다른 족속들처럼 그저 만이蠻夷, 조선만이朝鮮蠻夷일 뿐이었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을 역사에서 찾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본문만 35책인 『조선사』를 만들면서 『사기』 「조선열전」을 그대로 차용했다. 단군조선은 신화라고 배제하고, 중간을 생략한 채 위만조선부터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우리나라는 식민사관의 그늘에서 벗어나느라 애써야만 했고, 지금도 그 잔재를 완전히 제거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단군과 황제
조선의 단군은 역사에서 배제되어 신화가 되었고, 중국의 황제는 신화 전설에서 역사로 편입되었다. 단군 조각상은 몽매한 자들에게 머리가 잘리는 수난을 겪었지만, 황제의 형상은 중국 대륙 곳곳에서 새겨지고 세워졌으며, 그림으로도 넘쳐난다. 단군을 배제한 우리의 역사는 많아야 4천여 년, 황제를 소환한 중국의 역사는 늘어나 5천여 년. 한쪽은 빼지 말아야 할 것을 뺐고, 다른 한쪽은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었다. 이게 끝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중국은 모든 씨족들을 황제로 연결시켜 하나의 자손, 즉 염황자손炎黃子孫이란 말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다민족 사회에서 민족통합의 근거를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군을 배제함으로써 창조신화는 물론이고 민족 신화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우를 범했으며, 북방계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절연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제대로 찾아보기도 전에 고구려는 중화민족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편입되어 지리적, 역사적, 그리고 민족적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는 뜻이다. 황제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지면상 생략하고,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은 『만들어진 민족주의 - 황제신화』(김선자, 책세상, 2007년) 일독을 권한다.
하상주단대공정과 동북공정
『사기』는 「오제본기」에 이어 「하본기夏本紀」로 들어간다. 우禹 임금이 만들었다는 하 나라는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도성의 위치 등이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이리두二里頭(황하 중,하류 중심의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 유적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과연 발굴된 곳이 도성 유적지인지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사기』는 물론이고, 그 이전인 전국시대에 나온 『죽서기년竹書紀年(일명 『급총기년汲塚紀年』) 역시 하를 하나의 나라로 간주했다.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하는 상, 주와 함께 삼대로 칭해지며 정사에 자리매김한 지 오래이다.
1996년 5월 16일 중국 국무원은 하상주, 삼대(三代)의 연대를 단정하겠다는 「하상주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다. 전체 9개 과제, 44개 주제를 중심으로 전문가 2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학술 프로젝트였다. 2000년 11월 9일 정식으로 「하상주연표」가 공포되었다. 이에 따르면, 하조는 기원전 2070년, 하와 상의 분계는 기원전 1600년, 반경盤庚이 천도한 것은 1300년, 무왕이 상나라 주를 정벌하여 주나라를 세운 해는 1046년이다. 이외에도 재위 왕들의 연대가 확정되었다.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연대 측정기술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된 공동 연구는 이렇게 끝났다. 하지만 발표와 동시에 논쟁이 시작되었으며,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역사는 기년을 1229년 앞당기게 되었다. 시간적인 연대 확정이 끝났으니 당연히 공간적인 지역 확정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2002년 동북공정, 2003년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요하遼河공정) 등 일련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동북공정은 중국에겐 나라의 경계 확정이라는 의미가 있겠으나, 한국인은 다르다. 우리가 보기에 이는 고구려와 한국의 연원적 관계성을 끊어 고구려 역사 인식을 왜곡하는 것이자 한민족 북방계와의 관계 절연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홍산紅山 문화의 발견이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蔵)가 처음 발견했으며, 1935년 적봉赤峰시 동쪽에 위치한 홍산에서 발굴이 진행되었다. 대략 5,6천 년 전부터 시작하여 채도와 세석기, 도기와 옥기를 특색으로 하는 신석기 문화이다. 중국학자들은 이를 앙소문화 또는 하모두河姆渡 문화와 연계시키려고 하지만 별개의 문화로 보는 관점도 있다. 이렇듯 동북 지역은 황제의 후손들과 다른 민족의 발생지이며, 특히 한국 민족의 북방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미 동북공정은 끝나고, 발해를 건국한 해동성왕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이 아니라 만족滿族 선조인 말갈족靺鞨族 속말부粟末部 사람이 되고 말았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