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 어려운 인재, 조건 좋은 해외로 떠나... 국가에도 타격”

“매일 가르치는 학생이 찾아와 ‘형편이 힘들어 연구를 못하겠어요’라고 토로합니다. 이게 서울대 인문대 교수들의 일상입니다.”
서울대 인문대의 49년 역사상 첫 여성 학장으로서 취임 1주년을 맞은 안지현 서울대 인문대학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서울대에서 일부 교수들이 연봉·연구비 정체 문제로 잇따라 해외 대학으로 옮긴 데 이어 대학원생들까지 이탈하는 움직임에 대해 “유출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유수한 인재가 한국 대학으로 오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출범 50년을 맞은 서울대 인문대는 최근 한 학기씩 지원하는 현행 대학원생 장학금 제도를 개편해 2~4년 동안 등록금·생활비를 지급하는 장학금 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안 학장은 지난 15일 본지와 만나 “대학원생들이 4년 동안 생계 걱정 없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서울대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라며 “학부생들에게 공부를 권할 수 없던 인문대 교수들의 가장 큰 소망 사업”이라고 했다.
-대학원생들을 위한 통합 장학금 신설을 추진하는데.
“‘우수한 학생들한테 공부를 권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인문대 교수들의 가장 큰 아픔이자 비애다. 우수한 학생들 중에 부자가 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마음을 접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연구생들이 많다. 그 학생들이 이제 4년 동안 적어도 자기가 생계 걱정 안 하고 안정적으로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서울대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대학원생들을 위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게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건 기본적인 일이다.”

-왜 통합 장학금인가.
“대학원생들에게는 긴 호흡의 연구를 연속성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원생들이 지금은 한 학기 연구하고 생계가 어려워서 수 학기 휴학하고, 아기를 낳았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어 또 휴학하고, 이를 반복하고 있다. 연구할 틈이 없다. 그 사이에 중요한 연구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만약 2년을 쉬었다면 2년 동안 나왔던 연구들을 다시 따라잡고 메우는 것이 쉽지 않다.”
-대학원생들이 처한 어려움은 무엇인가.
“대학원생들을 가르쳐본 교수들은 매일 누군가 울면서 찾아와서 ‘연구하면서 생계 유지하기 너무 어렵다’고 토로하는 것을 들어주는 게 일상이다. 대학원생들이 조교로 근무하고 한 달에 60만원을 받는데 아르바이트를 더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안 된다. 미국 대학 인문사회 계열은 4년 동안 장학금을 보장해준다. 건강보험도 포함이다. 나 또한 4년 장학금을 보장받았기에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장학금 문제가 인재 유출로도 이어지는가.
“생계 유지가 어려워서 4년짜리 통합 장학금을 주는 미국이나 중국 등으로 가는 대학원생들이 태반이다. 중어중문학을 연구하겠다고 미국 대학으로 가기도 한다. 4년 장학금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생계가 힘들어서 공부를 못 하겠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도 지원해주지 못한다. 우리 교수들이 어떻게 이 학생들을 붙잡겠나.”
-인재 유출이 인문학의 위기에도 영향을 미치나.
“모든 대학원생들이 미국이나 중국에 쏠리면 그런 국가에 편향된 연구가 나올 수 있다. 학문 생태계를 고려했을 때 바람직하지 않다. 중국은 이 중요성을 인지하고 대학에 적극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다양성을 이어가야 한다. 서울대도 독특한 역사를 거치며 동서양의 여러 학문적 영향을 받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이어왔다. 이런 학문의 다양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 학계의 큰 손실이다.”
-대학원생 유출이 교육에도 손실인가.
“학부 교육에서도 대학원생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토론형 수업을 열고 학부생들을 밀착 지도해줘야 하는데 우수한 대학원생들이 오지 않으면 학부 교육에도 타격이 크다. 가령 마이클 샌델 교수는 수백명 학생이 듣는 대형 강의를 하면서도 다 분반으로 쪼개져 토론을 하고 글을 쓰는 수업을 운영한다고 한다. 이들의 글과 토론을 교수 1명이 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생의 유출은 학부생들에게도 큰 손해다.”

-교수 유출 문제 또한 심각하다.
“유출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유망한 젊은 교수들이 한국 대학에 오려고 하지조차 않는다. 이건 어느 단과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거액을 들여 노벨상을 타온 석학 여러 명을 데려오는 등의 단발적인 방식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등록금도 현실화하지 못하고 교육부에 종속돼 있고 유연한 제도를 만들 수가 없는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
“대학이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규제로 손발이 묶여 있으니 제도를 바꾸려 해도 너무 힘들고 재정 확충도 더디다. 대학이 우수한 교육을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 이런 대학을 믿고 제도나 이런 거 여러 가지를 좀 유연하게 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길을 열어주는 게 우리나라를 위한 방향이다.”
-인문대 출범 50주년을 맞았다. 앞으로의 인문대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을 하면서 가치 중심의 사회에서 이익 중심의 사회로 변했다. 이에 더해 기술 발전까지 극적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이제 서울대 인문대도 그에 적응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인문대학과 인문학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가령 AI 시대에서 인문학의 중요한 능력은 문해력이다. AI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데이터라고 하지만 그 데이터를 입력하고 읽고 분석하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문해력이다. 연구진들이 데이터를 선별하고 잘 읽어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앞으로 인문대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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