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법정] 계약서를 써 봄이 좋겠다고 봄

김찬년 2025. 7. 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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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라고 해서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 아냐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어떠한 거래를 하고자 하는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두는 것 좋아
▲ 김찬년 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 판사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작가 김유정이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와 집필한 단편소설 봄봄 속, 무려 3년 7개월간 돈 한 푼 못 받고 ‘장인님’ 댁에서 일한 주인공의 방백이다.

농사를 좀 지어주면 둘째딸 점순이와 성례를 치러주마 하는 장인님 말만 믿었는데 ‘점순이 키가 다 자라지 않았다’고 돌아오는 장인님 대답에 도리가 없다. 혼례를 치러주기로 하는 기한을 확실히 정하여 계약하고, 그 계약 내용을 담은 계약서를 작성했더라면 주인공과 장인님이 옥신각신 몸싸움을 벌일 일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이 작품이 탄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필자 역시 과거 있었던 일에 대해 사실과는 다소 다르게, 대개의 경우 큰 줄거리는 그대로이더라도 세부적인 사항을 과장되거나 왜곡되게, 기억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적이 몇 번 있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관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단계에서부터 그 사람의 주관이나 어떠한 기대, 싫거나 좋다고 느끼는 감정이 결부되고, 그것을 갈무리하는 단계에서도 추가적인 가공을 피할 수 없을 것인데다가 저장된 기억마저 시간에 따라 변질·변형될 수 있다.

단단한 사물도 세월의 풍파를 피할 수 없는데 유기물인 인간 뇌세포에 전기신호로 형성되는 기억이 왜곡된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주인공과 장인님 모두 점순이가 성인이 되어 혼례를 치를 수 있을 때까지 주인공이 농사일을 거든다는 데 이견이 없었을 테지만 ‘점순이가 혼례를 치를 수 있을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합의 없이, 주인공은 그때가 한두 해 뒤라고, 장인님은 점순이 키가 훌쩍 큰 때라고, 각자 막연한 기대를 품고 일을 시작한 데서 갈등의 씨앗은 뿌려졌다.

민사재판 계속 중 일도양단의 판결로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치 않아 보이고, 해당 사건을 해결하더라도(법원은 당사자가 제출한 청구취지의 범위 내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 연쇄적인 분쟁이 계속될 우려가 있는 경우, 법원은 사건을 조정 절차로 회부할 수 있다.

수명법관으로 조정에 들어가 보면, 원고, 피고 모두 억울하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데 상대방이 합의한 바도 없는 사항에 대해 억지를 부린다. 각자의 기억에 따르자면 각자가 억울한 것도 충분히 공감이 간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과 당사자의 기억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십수 년 간 협력업체로 일해 온 사이이거나 같은 동네에서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긴 사이일수록 돈거래, 공사 등 관련 간단한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문제 발생 시 서로 감정이 심히 상하고 분쟁 해결에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수년이 걸려 판결서를 받아들더라도(변호사와 상담하고, 소를 제기하고, 법원에서 양 당사자의 주장이나 증거신청 내용을 살펴보고, 또 서로 상대방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제1심 판결에 그치지 않고 항소에 상고까지 거친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이제 그 판결서 내용대로 집행을 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계약서라고 해서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각서, 약정서, 합의서, 계약서 등 명칭은 무엇이든 무방하고, 단지 약속하는 사람들의 인적사항, 약속하는 날짜,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자유롭게 적고, 각자 서명하거나 날인하면 된다.

거래 도중 발생할 수 있는 예외적이거나 돌발적인 상황에서 막연히 상대방이 그 부분만큼은 양보하겠지 기대하기 보다는 계약서에 적어두는 걸 추천한다.

사실 소설의 제목은 ‘봄봄’이 아니라 ‘봄·봄’이다. 봄과 봄 사이 ‘·’은 무슨 의미인지, ‘봄’이 바라본다는 의미인지, 계절인지, 계절이라면 소설의 배경이 된 실제 그 계절인지, 주인공이 3년 7개월간 지나쳐오고 앞으로 점순이가 다 자랄 때까지 맞이할 봄을 의미하는지, 청춘인 주인공과 점순이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작가의 고향이자 소설의 배경인 춘천이 ‘봄내’라는 사실도 공교롭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이렇게 여러 각도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을 더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계약서에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서로 어떠한 거래를 하고자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두는 것이 좋다.

드물지만, 점 하나가 찍혀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두고 다투기도 하고, 그 해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도 한다. 도장을 찍기 전에 주변 사람에게 거래 내용을 말로 설명한 다음 계약서 초안을 보여주고 자신이 구상한 거래 내용이 잘 녹아들어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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