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일생 바친 의암선생 대한민국장 훈격 높여야”
서간도 회인현 무장해제 요구 의병해산
귀국 후 황해도·평안도서 제자 양성
정미7조약 계기 연해주 망명길 올라
노령 항일세력 통합 십삼도의군 편성
서간도 망명 생활 중 74세 일생 마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의암선생 지역사회 관심·지지 필요”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 20. 의암 류인석 업적 인정 받아야
‘진실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각자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道義)를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나라만이 아니라 천하만세에 전할 수 있는 공(功)이요, 업적이 될 것입니다.’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의병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의암 류인석(1842년~1915년)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여성(汝聖)이며, 호(號)는 의암(毅菴)이다.
어려서부터 문재로 인정받은 류인석은 14세 때 양평으로 가 당시 유학의 태두(泰斗)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했다. 그 뒤 중암(重菴) 김평묵, 성재(省齋)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학통을 이어 받아 양평, 춘천, 홍천, 원주, 제천 등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에서 모여든 유생을 가르치며 거유(巨儒)로 성장했다.

■ 학자에서 의병장으로
1893년 선생은 제천 장담으로 이사, 이후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류인석은 1895년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가 의병 활동에 투신하게 된 1895년의 한반도는 그야말로 혼란했다.
일제는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했고, 정부에서는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내렸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은 유생 중심의 의병항쟁을 야기했다.
류인석의 호좌 의병진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호좌 의병진은 제천, 단양 등에서 활약을 이어가던 중 열세에 몰리자 영월로 집결했다.
이때 이필희,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선생에게 의병장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그는 ‘복수보형(復讐保形,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을 내세우며 의병대장에 취임, 격문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표하고 의병항쟁 전면에 나섰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류인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 청풍군수 서상기 등 토왜(土倭)를 참수했고, 1896년 2월에는 충주성을 장악했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고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을 호서로 파견해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했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계속되는 접전과 보급로 차단으로 인한 물자조달 어려움 등으로 의병진은 결국 같은해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했다.
■ 의병 탄압에 결국 고향을 떠나다
당시 중앙 내각은 친일세력과 친러세력간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러내각이 조직, 이들은 단발령을 철회하고, 관군을 파병하며 의병 해산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류인석은 정부가 망국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특히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결국 관군은 1896년 5월 26일 선생의 의병진에 대해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최후의 거점이던 제천성마저 상실하자 의병진은 단양에서 전열을 수습했다. 그러나 장기간 이어진 항전으로 전력 손실이 크자 결국 활동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이 시작됐다.
의병진은 단양을 떠나 풍기, 영춘, 충주, 음성, 괴산, 원주 등지를 전전하며 간간이 관군 및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후 영월, 평창, 정선, 강릉, 대화를 거치고, 양구, 회양, 평강, 소금강, 안변, 영흥을 지나 양덕, 맹산, 덕천 등지에 주둔했다.
이에 류인석은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재기항쟁을 준비할 생각으로 서간도 망명을 떠났다. 고생 끝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懷仁縣)에 도착했으나 그곳의 지방관리는 의병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결국 의병 219명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해산, 을미의병 항쟁은 마침표를 찍었다.
의병해산 후 류인석은 한인동포가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했다. 이듬해(1897년) 3월에는 고종황제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이후 1900년대 들어 중국 북부지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자 류인석은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했다. 이때부터는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했다.
세상은 그를 한 곳에 머무르게 두지 않았다.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을 계기로 류인석은 연해주 망명길에 올랐다. 이에 1908년 7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후 류인석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타국에서도 계속된 애국
연해주로 간 류인석은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함께 노령(시베리아 일대) 내의 분산된 항일세력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10년 6월 10일 ‘십삼도의군’이 편성됐다. 그러나 이 의군이 항일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조국은 일제에게 주권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를 조직했다.
총대로 추대된 류인석은 즉시 합병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8624명이 이름을 올린 서명은 세계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발송됐다.
하지만 연해주의 형세도 점차 불안정해졌다. 일제는 연해주 일대가 점차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변해가자 러시아에 이를 항의했다. 이에 러시아는 이상설, 이범윤, 김좌두, 이규풍 등의 항일운동가를 체포했다.
결국 류인석은 다시 한 번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1914년 3월 봉천성의 서풍현으로 옮겨 세 번째 서간도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나 노쇠한 몸은 더 이상 항일운동을 이어갈 힘을 그에게 주지 못했다.
이듬해 1월 29일, 류인석은 74세를 일기로 병사하며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일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대한민국장으로 훈격 상향 필요
류인석은 그의 고향인 춘천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고, 현재도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아쉬움 중 하나는 수많은 활약을 펼친 류인석이 건국훈장 중 가장 높은 격인 대한민국장이 아닌 대통령장을 받았다는 점이다.
의암류인석 기념관의 이흥권 관장과 목진호 학예연구사는 “의암 선생은 과거 제한적인 내용만으로도 공적 심사가 이뤄졌음에도 2등급을 받았다. 이후 오랜기간 연구가 계속되며 그의 업적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류인석 선생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었다. 훈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의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민엽 기자 jmy4096@kado.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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