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학살에 조각난 일상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최석환 기자 2025. 7. 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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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의 기억

응우옌티본 "가족 40명 잃었지만 시신조차 없어"
남의 집 전전하며 생활, 위로보다 가족 묘 지원 필요
하미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7일 오후 아버지 묘가 있는 디엔즈엉사 공동묘지에서 향초에 불을 피우고 있다. /최석환 기자

한낮 기온 33도를 기록한 지난 7일 오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즈엉사 하미마을 공동묘지. 응우옌티본(63) 씨가 푹푹 찌는 날씨에도 긴 외투에 벙거지 차림으로 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그는 57년 전 한국 군인들이 저지른 하미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생존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학살 사건 후에 사망했다.

응우옌티본 씨는 한 움큼 쥔 향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아버지 무덤부터 사방에 자리 잡은 친인척 묘비 한 곳 한 곳을 찾아다니며 초를 꽂았다. 10곳쯤 돌았을까. 다시 아버지 묘지로 돌아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 저 왔어요. 오늘은 혼자가 아니에요. 한국 사람과 같이 가족들 만나러 왔어요. 모두 기뻐하실 거라고 믿어요. 모든 가족의 평안을 빕니다."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7일 오후 아버지 묘 앞에 서서 양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여섯 살 기억 속의 전쟁 = 응우옌티본 씨를 평생 고통 속에 밀어 넣은 하미학살 사건은 57년 전인 1968년 2월 24일(음력 1월 26일)에 일어났다. 이날 민간인 135명(하미마을 위령비 기준)이 한국군에게 살해됐다. 그중 59명이 10살도 안 된 아이였다. 지옥보다 더한 현장에서 응우옌티본 씨는 어머니 쯔엉티지악(당시 46), 오빠 응우옌응으(16), 언니 응우옌티응언(12)를 잃었다. 여섯 살 때 겪은 일이었다.

"그날 아침, 가족과 밥을 먹고 있었다. 머리 위로 대나무가 터질 때 나는 '바바바바' 하는 소리가 났다. 밥상 위에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위를 보니 대나무 지붕이 불타고 있었다. 다른 무언가를 챙길 여력도 없었다. 오빠는 밥통만 챙겨 밖을 나왔다."

하지만 문을 나선 그들 앞에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가족들은 주민들과 함께 다른 집 마당에 끌려갔다. 총성이 울렸다.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세 살짜리 막내 여동생이 눈물을 터뜨렸다. 한국 군인은 그 자리에 수류탄을 던졌다.

"어머니가 나를, 언니가 어린 막내 응우옌티봉을 안고 있었다. 총을 맞고 둘 다 쓰러졌다. 막내가 놀라 소리 내 울었다. 소리가 난 곳에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동생은 입이 터졌고, 턱도 함몰됐다. 입안이 보일 정도였다. 부상 정도가 심각했다. 살이 가슴까지 떨어진 모습이 기억난다. 지금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응우옌티본 씨는 이마에 파편이 박혔지만, 여동생과 함께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한국군이 마을을 떠난 후 주민들에게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는 현장에 없어 생존했다.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7일 오후 가족 묘를 돌아다니면서 향초를 한 곳 한 곳에 꽂고 있다. /최석환 기자

◇친인척 포함 40명 몰살, 시신도 묘지도 남지 않았다 = 응우옌티본 씨는 당시 자신이 잃은 가족 수를 헤아리다 고개를 떨궜다.

"같이 살던 가족에 더해 한국 군인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은 친척들까지 합해 40명 정도예요.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다 묘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학살 다음 날 한국군은 불도저 두 대를 끌고 와 마을을 짓밟았다. 증거를 인멸하려고 시신이 매장된 곳을 파헤쳤다. 주검을 밀어버렸다. 유해가 산산이 조각났다. 가뜩이나 마을에 짙게 물들었던 피가 더 진해졌다.

결국 일부 친인척만 따로 묘를 만들었다. 현재 공동묘지에 있는 가족 묘비는 친언니, 큰아버지 등 10여 기에 불과하다. 돈도 돈이지만, 누구 시신인지 알 길이 없어 안치조차 어려웠다. 그나마 시신이 없어도 무당을 불러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던 친언니만 따로 묘비를 뒀다.

응우옌티본 씨는 아버지 묘를 찾을 때면 온 가족을 기리며 향을 피운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찾는다. 이 묘지에서 하미학살이 일어난 곳까지는 차로 5분 거리다. 하미위령비가 그 자리다. 위령비 옆은 과거 응우옌티본 가족이 살던 집터이자, 시신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던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는 거주지와도 멀지 않다.

"시신을 찾지 못해 가족마다 각각 묘지를 만들지 못했지만, 아버지 무덤 앞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평안과 건강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 하미학살 위령비 쪽에서도 향을 피우고 있다."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7일 오후 자택에서 동생 영정 사진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 /최석환 기자

◇유일한 핏줄, 미국에서의 비극 = 하미학살 현장에서 함께 살아남은 막내 여동생은 당시 심각한 부상을 겪고 다낭 지역에 있던 독일행 의료선을 타고 이송됐다. 수술만 40여 차례 받았다.

끝내 베트남에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 가정에 입양됐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연락이 끊겼다. 1995년이 되어서야 재회했다. 그전까지는 만나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동생이 베트남 고향을 방문해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베트남어를 구사할 줄 몰라 직접 소통이 어려웠다. 서로 엉엉 울다가 헤어졌다."

왕래가 잦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머지않아 비극으로 돌아왔다. 미국인과 결혼했던 동생이 배우자에게 살해당했다. 회사와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남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라 늘 애정이 컸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남편에게 살해돼버렸다. 남편에 의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처럼 위장되기까지 했다. 마지막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겨 한때 나는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응우옌티본 씨가 4일 오전 자택에서 여동생 과거 부부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최석환 기자

◇힘들어도 학살 현장 주위 떠날 수 없었다 = 학살 사건 후 그의 삶은 가난과 질병,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남의 집에 살면서 아이를 놀아주는 일을 하거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결혼해 쌍둥이 딸과 막내딸을 얻었는데 큰딸은 태어날 때부터 다치면 피가 잘 멈추지 않았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병원에 갔다. 돈이 없어 이곳저곳에 빌렸다. 너무 많이 빌려서 더는 빌리기 어려웠다. 다들 갚을 능력이 없는 걸 잘 알았다.

"딸들에게 줄 밥이 없어 굶기도 했다. 그래도 뭐라도 먹을 게 있으면 딸들에게 줬다. 내가 힘들 때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을 때마다 딸들은 '엄마, 우리는 어떡하라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붙잡았다. 그게 날 다시 일으켰다."

현재 그가 사는 집은 비가 오면 물이 차는 구조다. 태풍이 오면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매년 피난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응우옌티본 씨는 묘지를 지키려고 아직 어디로든 떠난 적이 없다.

"여동생이 생전에 보내준 500달러에 빚을 보태 겨우 지은 곳이다. 무너지려면 진작에 무너졌을 수 있다. 태풍 때 죽었다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다. 난 그날 학살 현장에서 수류탄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죽을 운명이었으면 벌써 죽어야 했다. 자꾸 살아남는 걸 보면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다."

하미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도 같다. 숨진 가족 묘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학살 현장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4일 오전 베트남 하미마을에서 겪은 민간인 학살 사건 당일 기억을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응우옌티본 씨가 지난 7일 오전 민간인 학살 사건 당시 기억을 설명하다가 눈물을 터뜨렸다. /최석환 기자

◇한국에 바라는 점은 하나뿐 = 응우옌티본 씨는 민간인 학살 사건 여파로 다친 머리가 지금도 아프다. 신경이 다쳐 온몸으로 통증이 이어진다. 날씨가 조금만 변하면 두통이 심해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후유증을 안고 산다. 

하지만 그는 몸이 성치 않아도 자신보다도 주변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여유가 없어도 쌀을 나눠주고, 생계를 걱정하는 이웃을 챙긴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남은 것도 사람 덕분이다. 운 좋게 살아났다."

그가 한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단 하나다. "가장 큰 위로는 돌아가신 가족 모실 수 있는 묘지, 사당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거다. 묘지를 깔끔하게 수리하는 것도 그렇다. 개인적인 지원을 바라는 게 아니다."

응우옌티본 씨는 학살 사건만 떠올리면 매번 눈물을 터뜨린다. 그날 기억을 묻는 말을 받고 나서 10초도 안 돼 눈시울을 붉혔다. 트라우마가 심하지만, 한국에 악감정은 없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 '한국 사람 밉지 않으냐', '증오하지 않느냐'는 거다. 답을 주자면 그런 심경은 없다. 그 이유는 이를 물어본 사람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학살하라고 시킨 사람 잘못이다. 한국 정부 상대로 소송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60살을 넘은 나이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소송을 하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또 향을 들어 불을 붙였다. 동생 영정 사진 앞에 꽂은 향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