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는 걸 알게 되는 나날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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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여년을 살던 고향 땅 서울을 떠나 태안으로 이주한 뒤 두번의 여름을 보내고 있다.
얼마나 여러번 밤마다 마당을 지나갔을까, 저 두꺼비는.
밤마다 마당을 지나는 것들 중 두꺼비가 있다는 건 내가 모르는 것이었다.
앞집의 농부는 올해 육쪽마늘을 거두며 "심은 알보다 나온 알이 더 작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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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희 | 소설가
오십여년을 살던 고향 땅 서울을 떠나 태안으로 이주한 뒤 두번의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난밤에는 서해 중부, 남부 앞바다와 바깥 먼바다에 풍랑주의보가 떴다. 내가 사는 시골 마을에는 강풍주의보가 내려졌고, 지난해 심은 대추나무가 그 바람에 넘어졌다. 대추나무가 넘어졌는데도 바람을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둔 채 밤을 새웠다. 호우주의보는 호우경보로 바뀌었고, 시간당 89㎜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밤새 천둥과 번개가 번쩍여서 바깥이 하얀 밤이었다. 길 아래 천이 넘칠까봐 들락거리다 하얀 비, 하얀 바람 사이로 느리게 걷는 무언가를 보았다. 천둥과 번개가 치거나 말거나 자기 속도로 마당을 걷는 하얀 등짝. 전날 돌 틈으로 숨던 두꺼비였다. 얼마나 여러번 밤마다 마당을 지나갔을까, 저 두꺼비는. 밤마다 마당을 지나는 것들 중 두꺼비가 있다는 건 내가 모르는 것이었다.
서울을 떠나 산다는 건 내가 모르던 것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서울을 떠난 후에야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겠다. 그 목록은 흙에서 시작되어 동물로, 단어로 매일 쌓이고 있다.
닭이 알을 품은 지 정확히 22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태어난다. 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이 자라 알을 낳는 것도 놀랍지만, 날이 따뜻해지면서 암컷들이 일제히 알을 품는 건 경이롭다. 도대체 이건 누가 가르쳐준 걸까.
마늘과 양파는 겨울잠을 잔다. 이상기후로 냉해가 반복되면 육쪽마늘은 땅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 다시 겨울잠을 잔다고 한다. 앞집의 농부는 올해 육쪽마늘을 거두며 “심은 알보다 나온 알이 더 작아”라고 했다. 마늘종에 올라온 꽃은 ‘주아’라고 부른다. 주아를 심어 얻은 씨마늘을 다시 심어 겨울잠을 자고 영근 씨가 육쪽이 된다니 마늘은 1년 농사인 셈이다. 육쪽마늘 값이 비싼 게 이해가 간다.
감자는 꽃을 따줘야 흙 속 알이 커진다는데 꽃이 예뻐서 내버려뒀더니 꽃 핀 자리에 감자 닮은 씨가 맺혔다. 이 씨를 심어도 감자가 될까. 내년에는 씨를 심어볼 셈이다. ‘감자 싹’, ‘씨감자’라는 단어는 써봤지만 ‘감자 씨’라는 단어는 이제야 써 본다.
매년 5월5일에는 고추 모종을 심는다. 농부들도 고추 모종 심는 시기가 다 다른데 일주일쯤 먼저 심었다가 서리 맞고 다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 심는 시기를 눈치 보기 시작한다. 고추가 늦더라도 비교적 안전한 날짜가 어린이날이라는 농부의 말을 받아 적었다.
벌들도 치매에 걸린다는 걸 알려준 것은 양봉을 하는 이웃이다. 송홧가루가 날리면 논에 물을 댄다. 물 댄 논에 모내기를 하고 나면 논 가장자리에 제초제를 뿌리는데 벌들이 이런 화학제품에 노출되면 기억력이 떨어져 집을 찾지 못하는 교란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요즘은 드론으로 농약을 살포하니 벌들이 사라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고.
지나는 이웃은 텃밭에서 풀을 뽑는 내게 한마디씩 던진다. 풀은 잠도 안 자고 자라니 못 이긴다고, 참외는 첫 꽃을 따고, 수박은 나중 나온 꽃을 따줘야 한다고, 감자 수확한 두둑에 콩이라도 심으라고, 고구마는 줄기를 잡고 흔들어 줘야 뚱뚱해진다고.
폭우가 지나간 후 새벽같이 이장의 목소리가 밭마다 퍼진다. 간밤에 피해가 없는가 살피는 방송이다. 윗집 명상이는 꺾인 고추밭에서, 쉬는 날마다 와서 농사짓는 은행나무집은 폭우를 맞고도 살아남은 들깨밭에서 방송을 듣는다.
매일 집 앞을 지나가는 아흔 넘은 정씨 할머니는 그 새벽에도 지팡이를 앞세워 걷는다. 듣기로는 십수년 전 막내아들을 산업재해로 잃은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마다 걷는다고 했다. 낮은 산등을 핥으며 나온 해는 할머니 몸속에서도 매일 떠오른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언덕을 넘어가는 풍경을 매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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