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급망 전쟁 시대, 전략형 R&D가 해법

2025. 7. 2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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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익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실리콘밸리의 초기 혁신은 사소한 소비자 제품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노력이 아니라, 시대의 강력한 기술을 산업적·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닷컴 버블 붕괴로 일소된 과장된 기술의 가치에 대한 고민과 9·11 테러가 부여한 시대적 사명감에서 탄생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의 창립자 알렉스 카프는, 그의 최근 저서 ‘기술공화국’(2025)을 통해 국가를 배신하고 영리주의에 물들어 버린 실리콘밸리를 이렇게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美 중앙정보국(CIA)의 벤처캐피탈사 인큐텔(In-Q-Tel)의 지원을 받아 오사마 빈 라덴을 추적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정부에 성공적으로 조달함으로써 21세기 미국이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일조한 알렉스 카프의 다음 목표는 한때 기술 혁신과 국가 정책의 융합으로 미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기술공화국’ 재건을 향해있다.

샌프란시스코만(灣)을 중심으로 형성된 혁신클러스터인 실리콘밸리는 과거 미국 군사 기술과 국가 안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략물자의 생산에 있어 20세기 미국은 ‘기술공화국’으로 군림해 왔다.

하루 1척의 선박, 5분마다 1대의 항공기를 만들어내며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카운티는 미 해군의 탄도 미사일 전량을 제조했다.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설립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CIA의 스파이 위성에 정찰 장비를 납품했고, 아폴로 계획에 참여해 핵심 칩을 공급했다. 이 회사의 반도체 매출 중 80%가 펜타곤을 통한 정부 조달에서 비롯됐으며 이는 인텔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기술공화국 혁신의 주체인 정부가 테크 기업이 소비지향적 제품을 만드는 것을 독려하면서 ‘기업가형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는 자본주의 관점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나, 국가의 전략상으로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기업가형 국가의 결함이었다. 미국의 제조업은 빠른 속도로 경쟁력을 잃어갔고, 자국 내 완성형 공급망은 붕괴됐다. 이와 동시에 상업적 성공에 도취된 기술 엘리트 기업들은 국가적 프로젝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국가 안보와 지정학적 위협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했다. 기술공화국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분산된 공급망 체계에 대한 의존도는 방위부터 에너지 안보, AI에 이르는 미국의 국가경영 전략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펜타곤이 인도·태평양지역과 유럽에서의 제공권 장악을 위해 도입한 제5세대 전투기 F-35의 항공전자 시스템 제조는 분산된 다국적 공급망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제조업 가치사슬 경로의 출발점인 원자재 조달은 패권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의심케 할 정도로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F-35 전투기에는 400㎏ 이상의 희토류 원소가 포함되어 있다. 워싱턴은 뒤늦게 한때 폐광된 마운틴 패스를 통해 연간 1000톤의 네오디뮴-철-붕소 자석 생산 재개를 지원하고 나섰으나, 이는 2018년 중국이 생산한 13만8000톤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무기화된 희토류’의 위력은 중국 열세로 보였던 미중 전략경쟁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내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근거지로 하는 미국의 혁신 생태계는 막연하게 이를 부러워했던 후발 주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탄탄하지만은 않았다. 광범위한 상업적 주제에 폭넓게 분산된 미국의 연구·개발(R&D) 지출 전략이 정책적으로 집중된 투자를 밀어 붙여온 중국의 국가적 혁신 체제에 기습적인 추격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딥시크’(DeepSeek)는 AI 패권을 향한 글로벌 경쟁에서 중국 공산당의 국가적 자산으로 옹호되고 있으며, 화웨이와 SMIC를 필두로 하는 반도체 제조 공급망 자립 시도는 위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국무원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어 저가 수출로 공급 과잉을 해소하는 이차전지, 전기차 분야의 ‘붉은 공급망’ 확대 전략은, 어떤 산업이든 마음만 먹으면 절반의 시장은 가져갈 수 있는 중국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기술과 자원이 무기화된 시대에 국가는 어떠한 이유로 과학과 기술에 투자해야 하는가. 국가 경영의 핵심인 초크포인트 기술에 관한 정부 투자의 전략성을 제고하고 재원 투입의 효과성을 증진함으로써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한국의 확실한 조임목을 확보해 경제·안보·혁신 전략의 내실화에 기여해야 한다. 국가의 안보와 미래를 보장하는 전략형 R&D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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