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청동기 타임캡슐이 묻힌 울산의 옛 땅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2025. 7. 2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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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집단 주거지 완벽한 발굴
검단~중산까지 선사문화 벨트형성
제대로 된 발굴 보존 대책 세워야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 울산에서 만난 다섯 번째 기적

 지난 2021년 울산 강동 골프장 건설 부지에서 엄청난 발굴이 있었다. 발굴된 유물은 청동기 집터와 수혈(땅을 판 구멍), 석부와 석검 등이었다. 비슷한 류의 유적과 유물은 해안가인 강동 산하지구 개발현장에서도 출토됐다. 해안쪽 유적은 울산의 해안 가장 아래쪽인 신암부터 비교적 폭넓게 발견되고 있었다. 

 문제는 강동 골프장 부지의 경우 구릉지의 상층부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견됐다는 점이었다. 청동기 유적의 경우 산 상층부나 정상에서 발견된 경우는 드문 사례였다. 한반도 곳곳에서 드러난 청동기 유적 가운데 산 정상부의 유적은 울산에서 유난히 자주 발견됐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이야기해 주는 것일까. 

 지난해 봄 울산문화재연구원이 북구 중산동 일대를 뒤졌다. 중산스포츠타운 조성사업을 위한 발굴이었다. 전체부지의 극히 일부만 살폈지만 성과는 컸다. 부지 내 매장유산 표본조사 결과, 생활유적 혹은 유구 등 문화재가 발굴됐다. 표본 47개 가운데 25개에서 총 54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대부분이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었다. 발굴된 지역은 이미 청동기에서 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중산동 취락유적이 폭넓게 드러난 땅이었다.

 중산스포츠타운 일대에서 드러난 선사유적은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생활 유구 및 분묘 53기, 삼국시대 석실묘 1기 등으로,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지정될 경우 추가 발굴이 기대되는 대사건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대 이후 울산에서 이뤄진 선사유적 대부분은 그대로 파헤쳐지거나 묻히고 말았다. 문화재 발굴의 경우 보존 조치로는 '현지보존', '이전보존', '기록보존'으로 흔적을 남기지만 현지보존을 명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유는 개발논리가 앞섰기 때문이다.  

 중산스포츠타운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강동유적과 굴화유적, 반구동 항만유적 등 거의 모든 울산의 선사유적은 '현지보존' 결정이 아니라 그냥 덮이고 말았다. 개발논리에 밀린 또하나의 문화유산 훼손 사례다. 우리 문화재 당국의 안일한 문화유산 관리는 오랜 오명의 기록을 갖고 있다. 잠시 일제강점기로 가보자. 도쿄 국립박물관에 우리의 문화유산이 무려 6,751점이 보관돼 있다. 국회도서관 6,748점, 궁내청 4,678점 등 일본 전역에 한국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모두 합하면 6만 여점이 넘는다. 그 많은 유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제는 조선 강제병합을 이뤄내자 곧바로 한반도 곳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 전기회사 지점과 출장소를 두고 신라와 가야의 왕릉을 뒤졌다. 총독부의 묵인과 방조로 이뤄진 대대적인 도굴의 역사는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직후 현해탄을 건너갔고 그 증좌가 박물관 등지에 남아 있다.
 

# 도굴로 드러난 선사문명의 뿌리

 일제의 한반도 발굴은 역사 왜곡을 목적으로 이뤄졌다. 대상은 전라도 일대와 김해 양산, 그리고 울산 등 남쪽지역이었다. 왜곡된 임나일본부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성 발굴이었지만 파고 보니 오히려 자신들의 뿌리가 한반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당시에도 울산은 주목할 고대사의 비밀이 여럿 있었지만 '임나일본부'에 끼워맞출 유물이 없어 덮어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선사유적이 1990년대 이후 울산 땅에서 고대사의 타임캡슐처럼 열렸다. 신암과 서생 해안에서 나온 석기시대 유물과 웅촌 검단리와 삼남 신화리, 남구 옥현 일대에서 환호유적과 벼농사의 흔적은 일본의 역사학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울산에서 드러난 선사유적의 마지막 기적은 청동기 유적의 진수인 웅촌 검단리다. 고고학계에서는 회야의 둔덕인 웅촌 검단리부터 동천강 수계를 품은 북구 중산동 고분군까지 청동기 문화벨트를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이정도의 폭넓고 광범위한 청동기 유적은 국내에서 드문 경우다. 

 일부 학계에서는 검단의 청동기 세력과 중산의 청동기 세력이 단절됐다는 점을 들어 연결성을 부정했지만 최근에 다운동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이를 무색하게 할 새로운 발굴이 이어지면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검단리의 경우 동북아 최초의 환호유적지다. 발굴이 이뤄진 지난 1990년, 검단에서 환호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자 일본 역사학계가 당혹해 했다. 그 이전까지 그들은 선사의 환호유적은 왜에서 한반도로 역수출된 문명의 흔적이라며 한반도는 큐수의 요시나가리 같은 환호유적이 없지 않냐고 목젖을 세웠다. 반전은 울산 검단에서 드러났다. 울산 검단의 환호유적은 동북아 지역 청동기 시대의 고유한 문화 원형이다. '울산형 집자리'라는 고유 명칭을 얻은 울산에서 드러난 선사유적의 다섯번째 기적이다. 

 문제는 우리의 문화유적 관리 현황이다. 발굴 30여년이 지난 검단의 환호유적과 청동기 문명의 웅장한 현장은 풀더미에 가려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물론 재평가 작업이나 보존 활용방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선사유적의 마지막 기적의 땅인 검단은 그런 대우를 받는 상황이다. 일본은 야시노가리 환호유적을 선사문명의 핵심이라며 새롭게 재구성해 연간 300만명 이상의 세계인들을 맞고 있는데 말이다. 

 문수산을 북으로 두고 정족과 운암의 구릉을 따라 야트막하니 앉은 땅에 북쪽의 한무리 인류가 터을 잡은 흔적이 바로 검단이다. 이 땅은 오래전 북쪽 방향의 진산인 운암산이 곰의 형상이라고 주장한 북방의 이주민들이 스스로 곰의 자손이라며 고마족의 명패를 꽂았다. 그 뿌리의 혼이 오늘에 이어져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우신산국 이야기로 축제를 연다. 

 북방의 기세가 여전히 DNA로 전해지는 땅, 백두대간의 정기가 옹골차게 맺힌 정점이 검단이다. 여기서부터 북쪽의 중산까지를 쭉 훑어보면 울산이 왜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타임캡슐인지를 알게 한다. 한가지 더 짚어야 할 부분은 바로 지금까지 이어진 선사유적의 기적과 함께하는 연속성이다. 울산은 반구천에 인류가 모여든 시기부터 청동기와 철기를 지나 고대국가의 원형이 만들어진 선사시대의 보물창고다. 

 그 엄청난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드러나는 울산의 선사유적 발굴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