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은 위인전은 왜 모두 남성들 것이었나 [독서일기]
캐럴린 G. 하일브런 지음 오수원 옮김
마티 펴냄

전기와 자서전은 해당 인물에 대한 평가와 그가 살았던 역사를 담는다. 전기물은 후세에게 남기는 중요한 기록이자 청소년에게 모범상(role model)을 제공한다. 문제는 이 장르만큼 남성에게 치우친 장르도 없다는 것이다. 내 경험만 보더라도, 초등학교 때 읽은 위인전은 모두 남성 위인이었고 여성의 전기는 찾기 어려웠다. 나이팅게일이나 헬렌 켈러의 전기가 있기는 했지만, 남녀가 모두 읽는 남성 전기와 달리, 여성의 전기는 여성만 읽는 것이라 생각해서 손이 가지 않았다. 여성의 전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부엌에 들어가기 싫은 것은 여성도 마찬가지다.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과에서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개척했던 캐럴린 G. 하일브런은 〈여성 쓰기〉(마티, 2025)에 이렇게 썼다. “내가 전기에 깊이 몰입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 용기와 성취의 세계로 들어갈 길을 전기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세계로 들어가려면 나 자신을 남자아이로 상상해야 했다. 남성의 전기와 비슷한 여성의 전기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을 다룬 전기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기 작가들이 대체로 여성을 묵살해왔다는 것, 남성들만 전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듯 글을 써왔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나마 볼 수 있는 여성의 전기마저 엘리자베스 1세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처럼 왕실 여성이나 유명한 남성들의 삶에 연관된 여성의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문제이지만, 여성 전기로부터 모범상을 발견하려는 독자의 열망을 구속한 문제는 정작 따로 있다.
전기 작가가 비범한 여성을 발견했다손 쳐도, 여성의 야심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녀가 이룩한 고유한 성취의 풍경을 제대로 기록할 ‘여성 각본’이 없었다. “여성을 다룬 전기는 쓰였다 해도 수용 가능한 제약, 즉 무엇은 논해도 되고 무엇은 빼야 하는가에 대해 사회가 관습적으로 규정한 비좁은 논의 범위 내에서 쓰였다.” 여성 전기는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거나 전가한 각본을 재현한다. 전기 속에서 그녀가 발하는 권위는 그녀가 이루어놓은 업적이나 포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대의(종교 혹은 국가)에 바친 헌신에서 온다. 마치 여성은 개별적일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지은이는 사회적 각본에 따라 쓰인 여성 전기물에 ‘영적 자서전(spiritual autobiography)’이라는 조소 어린 명칭을 돌려주는데, 여성 전기물이 영적 자서전에 들어맞는 전통적인 기술을 벗어날 때 받게 되는 평가는 두 가지다. 먼저 부정적인 예. 신경증적이고, 불감증이었고(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괴물이었다(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다음은 긍정적인 예. 그녀는 여성 이상의 여성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었다(여성은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는 반쪽 인간이므로, 남성만이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남성적 미덕으로 보강되어야 했다).
마녀사냥의 또 다른 판본
이처럼 양식화된 평가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던 하일브런의 삶에도 적용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은 남성 위인이 자살을 하면, ‘영웅적’인 결단, ‘예술가적’ 고뇌라고 하고, 여성 위인이 자살하면 ‘신경증적’ 결함, ‘결혼 혹은 가정’ 실패 등등의 병리학적 꼬리표가 붙는다. 남성과 여성의 전기물은 이런 사회적 각본에 따라 쓰였다. 지은이는 사회적 각본에 충실하지 않은, 사회의 각본이 은폐해온, 여성의 삶을 승화라는 명분으로 왜곡하지 않는, 여성의 고통과 욕망에 충실한 전기와 자서전이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멀리사 피보스의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갈라파고스, 2024)는 하일브런이 고대했던 여성적 글쓰기의 교본처럼 읽힌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해온 여성 각본에는, 여성의 글쓰기에는 여성에게 알맞은 어조가 있다는 형식적인 굴레도 작동한다. 연애와 결혼, 어머니 노릇이라는 여성의 운명에 충실해야 하는 여성의 글쓰기는 펜을 칼처럼 휘둘러서는 안 된다.
또래보다 조숙한 몸을 가진 데다가, 유색인종이었던 피보스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연령의 남자들로부터 성적 해코지를 당했다. 남성이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그들이 어린 여자에게 가하는 성적 괴롭힘에는 ‘여성은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라는 교육적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런 과정을 겪는 소녀는 자신의 전(全) 인격성을 부정하게 되고(정신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고 믿게 되고), 신체마저도 전신이 아닌 유독 남자의 눈길을 받는 성적 부위나 매력 자원에 집중하게 되고, 그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자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라고 지각하게 된다.
어떤 소녀는 자신을 타자(사물화)로 만드는 눈길과 손길에 저항하지만, 어떤 소녀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거기에 적응한다. 전자가 여성답지 않다는 포화를 받게 되는 반면, 후자는 남성의 요구에 적응했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잡년(slut)’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피보스는 또래 남성이 소녀에게 성적으로 난잡하다는 낙인을 찍고 이를 모욕이나 괴롭힘의 핑계로 삼는 슬럿 셰이밍(slut-shaming) 과정을, 중세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단계에 여성의 주체성을 단속했던 마녀사냥의 또 다른 판본으로 본다. 마녀가 길들여졌듯이, ‘잡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은(받지 않으려는) 여성 또한 고분고분해진다. 남성의 훈도를 거부한 이 회고록은 진정한 ‘나’를 찾으려는 여성 독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난다, 2025)는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 대 모임〉(난다, 2020)으로 충격을 안겼던 유성원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산문집’이라는 명찰을 달았던 데 비해, 이번 책은 ‘소설’로 소개되고 있다. 두 권 다 에세이로 불러야 마땅하지만(세계는 ‘에세이’가 되는 중이다), 어떤 장르로 불리든 해석에는 도움이 안 된다. 한국에는 두 책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출간된 지 10년이 된 〈여섯 빛깔 무지개〉(워크룸 프레스, 2015)는 다양한 성소수자 문화를 엿보는 데 지금도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만,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 앞에서는 무력하다. 게이의 삶만큼 자기계발적인 삶도 찾기 힘들지만 지은이에게서는 게이들이 추구하는 자기계발적 노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가장 편한 방법은 게이들의 하위문화인 크루징(cruising: 길거리나 화장실, 극장, 공원 등의 공공장소나 게이 대상 업소를 돌아다니며 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 경험담으로 읽는 것이지만, 집요하게 묘사된 소변애호증(urophilia)이나 가피학 욕구는 성소수자의 세계가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보여준다. 언젠가 자세한 독후감을 써보고 싶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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