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마감한 신화, 냉정한 그의 결단이 만든 ‘코닥 모멘트’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5. 7. 26. 18:4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흥부전-110][오리저널-31] 이스트만 코닥

최근 패션업계 트렌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어패럴 브랜드’다. 사전적 의미로 ‘의류’를 뜻하는 어패럴 브랜드는 특히 타산업분야 브랜드의 상표권만 사서 라인업을 구축하는 일종의 라이센스 사업으로 통칭된다. 특히 UCLA나 예일(YALE)대와 같은 미국 명문대학교 로고는 최근 어패럴 브랜드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패션과 전혀 무관한 브랜드에서 로고만 따와 활용하는 의류 브랜드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조지 이스트만 코닥 창업자
감성 깨우는 브랜드의 힘
이런 흐름은 단순한 패션이 아니다. 특정 브랜드와 관련된 경험을 상기시키는 ‘감성’에 가까운 영역이다. 브랜드에서 뿜어져나오는 분위기는 경험과 추억으로 연결된다. 특히 이러한 어패럴 브랜드는 본사가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상표권만 빌려와서 옷을 만드는 구조다. 그 브랜드의 이름, 로고, 색감 같은 걸 그대로 가져와 옷에 입히는 셈이다.

사실 최근 유행했던 어패럴 브랜드는 꽤 오래된 방식이다. UCLA나 예일 같은 대학은 예전부터 라이선스를 팔아왔다. 실제 예일대는 이미 1980년대부터 로고 상표를 외부에 제공했다. 이 중 국내 어패럴 브랜드가 눈에 띄는 패션업계는 다름 아닌 아웃도어 시장이다. 주말 등산이나 트래킹, 캠핑 등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이와 연관된 아웃도어 브랜드가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자연다큐멘터리 TV 채널 디스커버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이 대표적이다 .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의 이미지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 TV채널과의 협업은 어패럴 업계에선 신의 한수로 불린다. 이러한 아웃도어 어패럴 브랜드 중에 주목받은 브랜드가 바로 코닥이다.

코닥 로고
옛날 아빠 서랍속의 필름통. 문방구에서 팔던 일회용카메라. 수학여행이나 소풍날 친구들의 얼굴을 꼭꼭 눌러담은 기억. 지금이야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게 가능했지만 예전엔 그랬지 못했다. 추억을 평생 간직하기 위해 남기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필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한 필름의 대명사이자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냈던 브랜드가 바로 코닥이다. 사실 요즘 MZ 세대 중엔 아예 의류브랜드로만 인식되기도 하지만 코닥은 정말로 화려했던 전성기를 보낸 브랜드다.

코닥의 정확한 사명은 이스트만 코닥. 그리고 이 회사를 만든 창업자가 바로 조지 이스트먼이다. 그는 1854년 7월 12일 미국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워터빌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당시에도 농업과 상업이 고루 발전한 조용한 도시였다. 아버지 조지 워싱턴 이스트먼은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이스트먼 상업학교(Eastman Commercial College)’라는 비즈니스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그는 조지가 7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마리아 킬버른 이스트먼은 홀로 세 남매를 키워야 했다.

조지는 어린 시절부터 책임감이 컸다.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가족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그러나 너무 버거웠던 그는 결국 열네 살 무렵 학교를 자퇴했다. 곧바로 사회에 발을 들인 그는 닥치는대로 일했다. 보험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고 이후 로체스터 시의 한 은행에 자리를 잡으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은행에서의 경리직 생활은 그의 인생에 의외의 밑거름이 됐다. 수학과 회계, 숫자에 대한 감각은 추후 사업가로서 자본을 다루는 역량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잠깐의 여유가 많든 발명의 기회
20대가 된 조지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오랜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큰맘 먹고 사진 장비를 구입했다. 하지만 당시 사진 촬영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찰칵’ 하고 끝나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코닥의 초창기 카메라 <코닥박물관>
그 당시 사용되던 장비는 어깨에 메기도 힘들 만큼 크고 무거웠다. 사진을 찍으려면 먼저 유리판 위에 감광유제를 직접 발라야 했고, 촬영 이후엔 현장에서 곧바로 암실을 만들어 현상까지 마쳐야 했다. 조금이라도 순서가 어긋나거나, 시간이 지체되면 한장의 사진조차 얻디 못했다. 이 기술은 ‘콜로디온 습판법’이라 불리는 방식이었다. 이는 1851년, 영국의 화학자 프레데릭 스콧 아처가 개발한 기술로, 19세기 중반부터 사진계의 표준처럼 쓰이고 있었다. 정밀하고 뛰어난 화질을 자랑했지만, 사용자 입장에선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이처럼 복잡하고 불편한 사진 촬영은 이스트먼에게 오히려 기회를 가져다 줬다.

“왜 이렇게 복잡하지? 좀 더 간단한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그는 불편함을 직접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진 기술의 세계에 몰두한 그는 낮에는 성실한 은행원으로 일하다 밤이 되면 작은 실험실로 향하는 이중생활을 병행했다.

코닥 광고문구
직접 화학약품을 배합하고, 새로운 방식의 감광유제를 실험하며 수많은 실패와 마주했다. 그렇게 긴 시간 끝에, 마침내 그는 ‘건식 사진건판’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 기술은 기존 습판법과 달리,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건조시킨 유리판을 사용해 언제든 사진을 찍고 나중에 현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혁신이었다. 이스트먼은 1879년 이 기술로 특허를 출원했다. 사진의 미래를 바꾸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듬해인 1880년, 그는 아예 이스트먼 드라이 플레이트 컴퍼니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차렸다. 사진을 더 쉽고,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일로 바꾸고 싶다는 꿈이 첫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빠른 성장 그리고 확장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미국을 넘어 유럽 시장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1888년 그는 세상을 바꿀 발명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바로 세계 최초의 휴대용 카메라, ‘코닥(Kodak)’이다. 제품은 단순했다. 무게는 줄었고, 작고 튼튼했으며, 아무리 사진을 몰라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어렵고 복잡한 카메라에 대한 고정 관념을 완전히 깨트린 제품이다. 그리고 코닥 카메라의 광고 카피는 도발적이면서도 단순했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한 문장이 담고 있던 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사진이 전문가의 전유물에서, 이제 누구나의 손끝으로 옮겨가는 순간이었다. 조지 이스트먼은 그렇게 세상의 추억을 남기는 새로운 방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코닥이라는 이름은 이후 한 세기 이상 동안 전 세계의 일상에 스며들게 된다.

코닥의 필름
이스트만이 사랑한 이니셜 ‘K’
코닥의 등장에는 그의 특별한 K 사랑이 자리한다. 이스트먼의 사업이 나날이 확장되면서 그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회사이름에 들어간 자신의 이름이 미국이 아닌 외국에서는 발음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편안하고 익숙하게 다가가야 했고 이를 위해 브랜딩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그렇게 탄생한 단어가 바로 ‘코닥(Kodak)’이다.

사실 놀랍게도 코닥에는 특별한 뜻이 없다. 다만 이스트먼은 특히 ‘K’라는 알파벳을 좋아했다.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랜딩 과정에서 K라는 알파벳을 살리기로 했다. 직접 입으로 소리내며 반복해 따라해보며 이런 저런 변형을 가했다. 맨 앞글자와 마지막 글자에 K를 배치했고 두 음절로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발음을 가진 단어가 바로 코닥이었다. 당연히 새롭게 만든 단어니 다른 브랜드나 단어와 겹칠 일이 없어 상표 등록도 용이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던 코닥은 그 자체로서 유니크하고 특별한 브랜드가 됐다.

코닥의 카메라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촬영이 됐다. 그리고 필름을 통째로 보내면 인화된 사진과 함께 새로운 필름이 장착된 카메라가 다시 배송되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말 버튼만 누르면 모든게 해결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코닥 제국은 필름의 대명사로 아날로그 사진 산업을 이끄는 제국을 완성했다.

이스트만은 탁월한 경영자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그는 사업과 혁신,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는 정서적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코닥 어페럴<코닥 어패럴>
그는 예술과 교육, 의료 분야에 막대한 기부를 하며 사회적 책임도 실천했다. 로체스터 공과대학교(RIT)와 MIT, 하버드 등 유수 대학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고, 자신의 고향인 뉴욕주 로체스터에는 이스트만 음악학교(Eastman School of Music)를 설립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건강 악화와 함께 어두워졌다.

1932년 3월 14일, 그는 요추협착증으로 추정되는 만성 통증에 시달리며 삶의 의욕을 잃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이렇게 적은 쪽지를 남긴다.

“My work is done. Why wait?”

코닥 모멘트 <코닥 페이스북>
(내 할 일은 끝났습니다. 더는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저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77세였다.

허무한 결말, 그리고 균형
그의 죽음은 당시에도 큰 충격이었다. 사업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완벽해 보였던 이스트만의 마지막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균형과 고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스트만의 사후에도 코닥은 20세기 내내 사진 산업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1930년대 코닥은 뉴욕 다우존스 산업지수를 이끄는 핵심 기업 중 하나였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 관련 광학 기술을 개발하고 필름을 공급하며 국가 기간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1976년 미국 사진 필름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한 기업이 바로 코닥이었다. 뚜렷한 경쟁자도 없는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기업이었다. 심지어 컬러 필름의 등장 역시 코닥이 기술 규격을 제정하고 국제 표준을 만들어냈다.

특히 1990년대는 코닥에게 있어 최고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코닥은 1억 대가 넘는 일회용 카메라를 판매했다. 그 제품들은 전 세계 여행지와 가족 행사, 졸업식, 결혼식 같은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하는 데 널리 쓰였다. 코닥 필름은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명암 표현으로도 유명해, 사진 애호가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코닥은 디지털 기술 분야에도 선도적으로 뛰어들었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 프로토타입은 1975년, 코닥의 기술자 스티븐 색슨이 개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코닥 경영진은 이 기술이 자사의 필름 사업을 위협할 것이라 판단해, 본격적인 상용화를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까지 코닥은 여전히 미국 20대 기업 안에 이름을 올렸다. 월가에서는 장기적 성장성과 안정성을 모두 갖춘 기술 기반 소비재 기업으로 평가받았다. 이 시기 코닥의 브랜드 가치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코닥의 위기는 1990년 이후 본격화됐다. 각 카메라 회사가 경쟁적으로 디지털 카메라 개발에 몰두했고 이러한 디지털 카메라의 발전은 필름 카메라의 종말을 불러왔다. 코닥은 이러한 디지털 카메라 산업 전환에 뒤쳐졌고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며 결국 파산 수순을 밟으며 그 전성기를 막을 내립니다. 이후 코닥은 산업 패러다임 전환 실패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예견됐던 실패, 그리고 부활
코닥의 위기는 사실 2000년대에 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었다.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필름 중심 사업 구조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디지털 기술로의 전환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의 캐논, 니콘, 소니 같은 기업들이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넓혀가며, 코닥의 위기감은 서서히 현실이 되어갔다.

코닥은 자사의 기술자 스티븐 색슨을 통해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던 회사였지만, 경영진은 기존 필름 사업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를 상품화하지 않았다. 결국 코닥은 혁신을 두려워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2000년대 초반,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며 필름 시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코닥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1월, 코닥은 미국 뉴욕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공식적으로 전성기를 마감했다. 이후 코닥은 오히려 ‘혁신 실패의 사례’로 손꼽히며 경영학 교과서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또다시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파산 이후 구조조정을 거친 코닥은 현재에도 그래픽 인쇄, 산업용 필름, 패키징, 의료 영상 기술 등을 중심으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또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산업이 바로 의류 및 어패럴 산업이다. 이는 코닥이 직접 제조·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자산을 활용한 라이선스 비즈니스의 일환이다. 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창업자 조지 이스트만이 추구했던 ‘일상을 바꾸는 기술’이라는 철학을 재해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때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카메라 브랜드 코닥은, 이제 기억 속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디지털 이전 시대, 필름 한 통에 담긴 24컷 혹은 36컷은 누구에게나 소중했고,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신중함과 기대감이 공존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한 순간이 오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코닥 모멘트야.”
‘⁠Kodak Moment’는 단지 광고 문구가 아니다. 한 시대의 감성과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하나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편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와는 분명히 다른,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넘쳐나는 사진과 동영상을 어떻게 보관하고 정리할까가 더큰 문제다. 옛날에는 가장 소중하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포착하고 기다리는 그 일이 더욱 어려웠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을 저장하고 그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대신 정말 소중한 그 순간을 어렵고 신중하게 선택해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더 쉬운 방법이 아닐까. 이처럼 예전 세대들에겐 추억의 브랜드이자 MZ세대에겐 의류 브랜드로만 기억되는 코닥이지만 제각각 우리들의 코닥 모멘트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