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앉은 거미도 쫓지 않는다”…‘완벽한 쉼’의 철학이 담긴 크로아티아의 피아카 문화

강석봉 기자 2025. 7. 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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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빨리빨리 휴가 vs 크로아티아 피아카 문화, 180도 다른 여름나기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 한국인들은 짧은 휴가에 빼곡한 일정을 채워 넣느라 바쁘다. 반면 아드리아해 연안의 크로아티아에서는 이 시기를 ‘피아카(Fjaka)’로 보낸다. 손에 거미가 앉아도 쫓지 않을 만큼 완벽한 쉼을 추구하는 독특한 휴가 문화다.

온전한 쉼을 즐기는 크로아티아인.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8월 5일 승전기념일, 전국이 멈춘다

크로아티아의 여름휴가는 8월 5일 승전기념일(Dan pobjede i domovinske zahvalnosti)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1995년 세르비아와의 독립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이 국경일 전후로 대부분의 관공서가 장기휴가에 들어간다. 행정업무가 사실상 마비될 정도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에 취한 사람들.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

피아카는 크로아티아 남부 달마티아 지역에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문화적 유산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 또는 ‘꿈꾸는 듯한 상태’로, 단순한 휴식을 넘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이완된 상태를 뜻한다.

달마티아 출신 작가 로레타 코바치치는 ”피아카는 우리 유전자에 세대를 거쳐 새겨진 문화“라며 ”신진대사 개선과 면역력 향상, 창의성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크로아티아 밴드 TBF의 노래 ‘Nostalgicna’ 음반 커버.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크로아티아 밴드 TBF의 노래 〈Nostalgična〉은 피아카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거미가 내 손에 내려앉았어… 근데 지금은 치우지 않을 거야. 난 피아카 중이니까(Pauk mi je sletija na ruku... al neću ga sad maknit. U fjaka san)” 거미를 치우는 것조차 쉼을 방해한다고 여길 만큼 완벽한 쉼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름휴가를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가는 인파들.



한국 휴가는 ‘제2의 노동’

한국의 여름휴가는 정반대다.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평균 3~4일의 짧은 휴가 동안 관광지 방문과 인증사진 촬영에 몰두한다.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에게 휴가는 오히려 고된 노동이 된다.

OECD 데이터를 보면 2023년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1,872시간으로 OECD 평균(1,752시간)보다 120시간 길다. 근로자 10명 중 6명은 연차 사용률이 76.1%에 그쳐 평균 12.6일만 휴가를 쓴다. 이마저도 빽빽한 일정으로 채워져 재충전보다는 피로를 남긴다.

장시간 노동과 휴식 없는 휴가는 정신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2020년 연구에 따르면 이는 우울증 등을 악화시키며, 한국은 OECD 국가 중 높은 우울증 유병률을 기록한다.

한국의 연도별 자살 사망자 수. 자료출처|연합뉴스



느림의 문화, 행복을 키우다

피아카는 크로아티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는 여유로운 시간을, 그리스의 ‘시가 시가(Siga Siga·천천히)’는 느린 삶의 리듬을 강조한다. 지중해 기후에서 비롯된 이 ‘의도적인 느림’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창의성을 높인다.

달마티아 지역에서는 피아카를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 여긴다. 오히려 중산층이 가장 불행하다. 피아카를 즐길 시간이 가장 부족하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느림’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창의성을 높인다.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의도적 휴식은 정신적 안정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강화한다. 실제로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크로아티아(29위, 6.511점), 이탈리아(31위, 6.467점), 그리스(37위, 6.217점) 모두 한국(53위, 5.902점)보다 높은 행복지수를 기록했다. 이들 국가의 느림의 문화가 사회적 지원, 자유, 관대한 태도와 함께 행복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노천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크로아티아인들.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번아웃 vs 재충전, 휴가의 두 얼굴

크로아티아관광청 마르코 유르치치(Marko Jurčić) 한국 지사장은 최근 한국 관광객들의 여행 패턴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동유럽 10개국 일주 패키지로 오는 한국분들이 크로아티아에서 고작 하루나 하루 반나절만 머물러요.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다녀온 곳을 제대로 기억이나 할까 싶어요.”

“크로아티아에서 보내는 주말이 치료보다 나을거예요.”라는 유럽의 저비용 항공사인 라이언에어(Ryanair)의 홍보 문구를 언급하는 마르코 지사장.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실제로 한국 관광객들은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서도 주요 포토존만 빠르게 돌며 인증샷을 찍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마르코 지사장은 “돌아가서 사진으로만 여행을 기억한다면 여행하는 진짜 목적이 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피아카.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피아카 중이야” 한 마디면 모든 게 용서

피아카의 가장 큰 매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명상이나 요가처럼 수업료를 내거나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편안한 곳에 누워 생각을 멈추고 주변의 소리, 냄새,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마르코 지사장은 피아카의 진짜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아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가 아니에요. 여행지에서 상념과 고민을 중단하고, 사람들의 움직임, 하늘빛의 변화, 공기의 흐름 등 그곳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는 마음가짐을 뜻하기도 해요.”

흥미로운 건 피아카가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통용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을 걸면 대답할 수도, 무시할 수도 있다. 아무리 급한 전화나 이메일이 와도 “피아카 중이다”라고 하면 모든 게 용인된다. 진정한 피아카 마스터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다.

달마티아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아이메, 바타 메 피아카!(Aime, vata me fjaka!)”라고 표현한다. “아, 피아카가 나를 사로잡았네”라는 뜻이다.

자그레브의 해질녘.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작은 변화로 시작하는 ‘느린 휴가’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는 한국인들에게 피아카를 온전히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하루 30분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공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어보자. 이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피이카를 즐기며 두브로브니크의 전경을 바라보는 여행자. 사진제공|크로아티아관광청/CNTB



마르코 지사장은 “크로아티아를 피아카로 즐겨보시길 바란다”며 “하루 스쳐 가기엔 너무 아름답고 멋진 문화가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빼곡한 일정표를 절반으로 줄여보면 어떨까. 크로아티아인들처럼 손에 앉은 거미도 쫓지 않을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나는 것만으로도 진짜 휴식이 무엇인지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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