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우리같은 ‘범인’이 유령같은 ‘범인’을 쫒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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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명 정치인과 전직 배우 부부가 간밤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담당 형사 고다이 쓰토무는 곧장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범인은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가공범(架空犯) 같다.
"방금까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부의 얼굴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었다", "히라쓰카 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다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하더니 이윽고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감싸인 눈을 부릅떴다" 등의 문장은 진짜 범인이 누구일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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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정치인-전직 배우 부부의 죽음… 범인 정체-범행동기 등 의문속 수사
섬세한 심리 묘사로 긴장감 더해
◇가공범/히가시노 게이고 지음·김선영 옮김/528쪽·2만2000원·북다


그런데 그 자살 위장조차 어쩐지 일부러 들키도록 허술하게 설계된 듯하다. 찝찝해하던 수사본부에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협박 편지가 도착한다. 내용은 이렇다. ‘내 동기는 단순 명쾌하다. 세상을 속이고, 인간으로서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계속해 온 두 사람에게 제재를 가했다.’
담당 형사 고다이 쓰토무는 곧장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사할수록 정체도, 범행 동기도 의문투성이라 마치 유령을 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범인은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가공범(架空犯) 같다.
데뷔 40주년을 맞은 세계적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신작을 펴냈다. 1985년 첫 소설 ‘방과 후’를 낸 뒤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 대표작을 포함해 무려 100편 넘는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국내에도 팬층이 두꺼운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서사는 속도감과 몰입감 있게 전개된다.
소설은 성실하고 예민한 고다이 형사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의 전작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에 등장하는 천재 물리학자 등과 비교하면 범인(凡人)에 가깝다. 예측 불허하고 기발한 추론으로 수사를 휘어잡지는 않는다. 고다이 형사는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듯 사건에 얽힌 수많은 인물을 차례로 조사하면서 서서히 수사망을 좁혀 나간다.
‘천재형’ 캐릭터가 아니기에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더 복잡하고 세밀하다. 용의자들이 무심코 쓰는 어휘의 차이나 값비싼 찻잔을 식기세척기에 넣은 사소한 행동 등에서 어렵사리 하나둘 실마리를 찾아 나간다. “가려운 곳에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답답함만 쌓여 갔다”는 고다이 형사의 심경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공범’은 작가의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 덕에 손에서 책을 놓기 어렵다. 여기에 간결한 문체, 섬세한 심리 묘사가 긴장감과 몰입감을 배가한다. “방금까지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부의 얼굴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었다”, “히라쓰카 원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다이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하더니 이윽고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감싸인 눈을 부릅떴다” 등의 문장은 진짜 범인이 누구일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다만 반전이 지나치게 반복되는 부분은 누군가에겐 작위적이고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다. 반전 장치로 마련된 복잡다단한 인간사도 여러 드라마에서 봤던 것 같은 기시감을 풍긴다. 소설 중후반은 진범과 동조자의 범행 동기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가해 사실이 ‘인간적’으로 묘사되는 느낌도 없지 않다.
히가시노 작가는 지난해 11월 일본 현지에서 이 책을 출간하면서 “이 소재를 작품으로 쓸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성실한 고다이 쓰토무를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란 점에서 팬들에게는 반갑지만, 전작들과 비교해 반전의 충격이나 신선도는 좀 무뎌진 느낌도 든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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