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소리 중독

서정민 2025. 7. 2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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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AI ASMR 유리과일 자르기 숏폼. [사진 유튜브 캡처]
“땅, 사각 사각, 사각 사각, 탁.”

나무 도마 위에 올라 있는 빨간 유리 사과에 스테인리스 칼이 살짝 부딪친다. 땅. 칼이 사과 과육을 파고들자 살얼음을 썰었을 때처럼 ‘사각’ 소리가 난다. 마지막엔 칼이 나무 도마에 부딪친다. 탁! 요즘 유튜브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유리과일 자르기’ ASMR 영상이다.

ASMR이란,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줄임말로 주로 청각을 중심으로 심리적 안정감과 쾌감을 얻는 감각적 경험을 말한다. 비 오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파도 소리 등이 SNS에서 ‘듣기 좋은’ 혹은 ‘잠을 부르는’ ASMR 인기 콘텐트로 꼽혔는데 요즘은 유리과일 자르는 소리가 인기다. 과일의 종류도 다양하다. 사과, 복숭아, 딸기, 수박, 용과 등.

댓글 반응도 좋다. “뭔가 존재할 수 없는 질감인데 넘 좋음.” “여러분 1.25배속해서 들어보세요!! 쾌감 쩔어유.” “과일 하나하나 디테일이 너무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음.”

AI를 활용해 DDP를 케이크로 표현한 숏폼. [사진 유튜브 캡처]
유튜브에서 AI ASMR을 검색하면 30초짜리 숏폼들을 여러 개 이어서 40분 혹은 1시간짜리 ASMR로 만든 콘텐트들도 올라와 있다. 실제로 이 영상을 듣고 있으면 ‘무념무상’ 마음이 편해진다. 말 그대로 보기에도 청량하고, 소리는 더욱 시원낭랑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유리과일 자르기 영상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면이라는 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유리라지만 과일 모양 디테일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만들 순 있다 치더라도, 깨지는 유리를 어떻게 얼음처럼 칼로 썰 수 있지?

실제로 사람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30초 내외의 숏폼으로 제작된 이 영상들은 모두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구현된 것이다. 특히 구글의 최신 AI 영상 생성 모델인 ‘베오3(Veo3)’를 이용하면 “나무 도마 위에 있는 빨간 유리사과를 칼로 자르는 영상을 만들어줘”라는 텍스트 입력만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장면과 소리를 1~2분 내에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 베오3는 구글 AI 멤버십 유료독자만 이용이 가능한데, 구글은 이 베오3 기능을 전 유튜브 숏츠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해남군이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으로 만든 키보드 ASMR 숏폼. [사진 유튜브 캡처]
AI를 활용한 인기 있는 ASMR 숏폼은 유리과일 자르기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도구 중 대표적인 키보드를 주제로 한 영상들도 많다. ‘탁탁탁’ 키보드를 칠 때마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 소리를 듣고 싶은 상상의 소리로 바꾼 영상들이다. AI를 이용해 키보드의 재질을 아예 꿀이나 떡, 젤리, 초밥 등으로 바꾼 뒤 이들을 눌렀을 때의 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이 ‘키보드 ASMR’을 이용한 홍보 영상으로 ‘대박’난 지자체도 있다. 전남 해남군이 고향사랑기부제 홍보 영상으로 제작한 ‘답례품 ASMR’ 영상이 지난 22일 조회수 30만 회를 돌파했다. 해당 인스타그램 계정 게재 일주일만의 기록이다. 이 AI 영상은 해남군의 고향사랑기부제 대표 답례품인 단호박, 반건조 생선, 곱창 김, 유기농 오디 등을 키보드에 얹어 각각 그 소리가 들리도록 한 것으로 컨셉트는 ‘소리로 느끼는 고향’이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AI 영상 기술을 활용해 공공기관의 홍보 영상을 만든 경우는 또 있다.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은 얼마 전 전 직원을 대상으로 AI 툴을 활용한 콘텐트 제작 등을 교육했고, 홍보팀장이 직접 DDP를 케이크처럼 자르는 숏폼 ‘DDP 한 조각 어때요’를 제작해 인스타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서울디자인재단 인스타와 유튜브에는 다른 직원들이 제작한 DDP 관련 AI 숏폼들도 계속 올라오고 있다.

개인 미디어에선 이미 너무 많은 비슷비슷한 숏폼들에 지쳐 있을 때다. 이때 AI를 활용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구현한 콘텐트는 확실히 차별점을 확보할 수 있다. 공공기관들에선 보수적이라는 수식어에서 탈피해 국민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낯설기만 했던 AI 콘텐트가 점점 더 깊숙이 실생활에 들어오고 있다. 물론 무엇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 선택을 잘 해야 하는 숙제는 남았다.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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