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어머니 위해 둔갑술 기댄 세종

2025. 7. 2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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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조선 시대 임금 중에 둔갑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렇다고 할 만한 사람이 한 명 있다. 놀랍게도 그 답은 과학에 가장 밝은 임금이라고들 말하는 세종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1420년에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가 큰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병이 걸리면 그저 갑작스럽게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닥친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귀신이 붙어서 괴롭히는 것이 질병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좋은 운을 얻기 위해 무슨 수를 쓴다든가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주술을 부려 보는 정도일 것이다.

둔갑술, 전쟁터서 활용 삼국사기 기록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뉴스1]
그래서 세종은 둔갑술에 심취했던 것 같다. 요즘에는 둔갑술이라는 말을 흔히 사람이 동물이나 물건으로 변신하는 술수라는 뜻으로 쓴다. 그렇지만 원래 고대의 둔갑술은 일종의 점술과 비슷했다. 둔갑술의 고수라는 사람들은 점술 중에서도 주로 변화하는 날짜와 시간에 따라 유리한 운을 가져올 수 있는 방향이나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

초창기 둔갑술은 특히나 전쟁터에서 활용되었다. 현실적으로 따져 보더라도 전쟁터에서는 확실히 유리한 장소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쪽에 자리 잡고 싸우면 유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전투 중에 해를 등지고 싸우면 적이 햇빛에 눈이 부셔서 우리 쪽을 잘 보지 못하므로 유리하다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그런 식으로 전쟁터에서는 지형이나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따라 유리한 위치와 방향을 정할 수는 있다. 아마도 둔갑술이라고 알려진 다양한 술수 중에 가끔 이런 지식이 맞아 드는 것이 있었기에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김암이라는 인물이 대단히 둔갑술에 밝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동시에 김암은 백성들에게 ‘육진병법’이라고 하는 군사 훈련 기술을 가르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군사 작전과 둔갑술의 관계를 보여 준다. 참고로 세월이 흐른 뒤 둔갑술이 변신술이라고 알려진 이유 역시 둔갑술을 연구한 사람들이 적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군사들을 숨겨서 매복시켰다가 기습하는 방법도 같이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적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산속에 군사를 잘 숨겨 놓을 줄 아는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과장되어 “둔갑술을 익힌 장군이 병사들을 나무나 바위로 변신시켜 못 알아보게 했다”라는 식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세종 임금 역시 둔갑술을 활용해 자신의 어머니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좋은 장소와 위치에 데려다 놓으면 조금이라도 좋은 운을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20년 음력 6월 6일 실록 기록을 보면 둔갑법에 따라 세종이 깊은 밤에 아픈 어머니를 개경사라고 하는 절에 옮겨 두었다고 한다. 이때 둔갑술사들이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나쁜 기운이 올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인지, 세종은 단 한 명의 일꾼만을 데리고 어머니 원경왕후의 거처에 머물렀다. 세종이 워낙 급박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날 궁궐 사람들은 임금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세종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교의 풀밭으로, 토원의 동천변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같은 달 14일에는 무당들을 동원해 밤하늘의 별들에 원경왕후의 목숨을 구해 달라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20일에는 세종이 어머니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치료에 도움이 되는 술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든 널리 알아보라며 전국에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을 보내서 바로 데려오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태종, 오른쪽(동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사진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마침, 그렇게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이에 원경왕후의 병세가 약간이지만 호전되어 세종은 잠시 희망을 갖기도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원경왕후를 치료할 수 없었다. 당시 원경왕후가 걸린 병은 학질(瘧疾)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흔히 학귀(瘧鬼)라는 나쁜 귀신이 붙으면 학질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현대에는 학질의 정체가 대개 말라리아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말라리아 열원충이라는 기생충을 사람 몸속에 옮겼을 때 생기는 병이며, 그 열원충이 몸속에서 어떻게 자라나고 퍼져 나가느냐에 따라 몸이 아프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둔갑술로 좋은 위치와 방향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열원충을 퇴치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필 한국의 말라리아는 삼일열 말라리아라고 해서 열원충이 새끼를 치고 자라나는 데 걸리는 기간에 따라 대략 삼일이 좀 못 되는 간격으로 감염된 사람이 아팠다가 안 아팠다가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 곁에 소위 기가 세다고 하는 친구가 문병하러 찾아올 때 즈음이 되면 잠시 안 아파지는 것 같기도 했다가 그 사람이 떠나고 나면 다시 몸이 아프게 되는 일이 우연히 벌어지기 좋다. 그러니 “기 센 친구가 떠났더니 귀신이 되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좋다. 아마 1420년 세종과 원경왕후 역시 둔갑술대로 운이 좋은 위치에 가 있었더니 몸이 좀 좋아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해와 달의 기운이 바뀌어 그 위치가 운이 나쁜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다시 몸이 나빠졌다는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음력 7월 10일, 원경왕후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 대단히 슬펐던지 실록에는 세종 임금이 머리를 풀고 발을 벗고 부르짖으며 통곡했다고 되어 있다. 세종은 그날 “전날에 점치는 사람이 이제 나쁜 일이 없을 거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렇게 되니 점치는 말은 정말로 못 믿을 이야기다”라고 말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세종은 그때까지 며칠간 밥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식사도 거른 채 통곡하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도 밥은 먹으라고 권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방원이 보여준 몇 안 되는 눈물을 보인 모습 아닌가 싶다.

현대의 우리는 말라리아 같은 감염병의 진짜 원인을 알고 있다. 여전히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말라리아 환자 숫자가 많은 말라리아 주의 국가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모기를 퇴치하고 말라리아 환자를 빨리 발견해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관리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말라리아 백신도 하나둘 나오고 있어서 아예 말라리아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대책도 개발되는 중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런 성과는 둔갑술의 발전으로 이룩해낸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찾아내기 위해 과학기술에 투자한 덕택이었다.

어머니 원경왕후 병은 학질, 말라리아 추정
세종은 천체 위치를 계산하는 ‘칠정산’을 편찬했다. 사진은 ‘칠정산외편’. [중앙포토]
나는 옛사람들이 신비로운 술법이나 주술에 빠져들었던 이유가 나름대로의 설명과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인 열원충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옛날에 누구는 병이 들고, 누구는 병이 들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겪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설명과 이유를 알고자 매달린다. 그렇다 보니 시간·방향·위치에 따라 행운과 불운이 정해진다는 식의 둔갑술 같은 설명이라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이치를 찾으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침내 옛 미신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위에서 얻어낸 귀한 유산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어머니를 잃은 세종은 이후 1430년대에 하늘의 별들을 관찰할 수 있는 혼천의라는 과학 기구의 개발을 추진했고 1440년대에는 해·달, 여러 행성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계산해 낼 수 있는 칠정산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600년이 지난 지금 그저 미루어 짐작해 보는 이야기일 뿐이기는 하지만, 나는 가끔 둔갑술로 어머니를 구할 수 없었음을 깨달은 세종이 이후 수십 년 동안 과학의 힘을 이용해 하늘과 땅이 움직이는 진짜 원리를 제대로 밝혀 보려고 평생 도전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곤 한다.

곽재식 작가·숭실사이버대 교수. 공상과학(SF) 소설가이자 과학자. 과학과 사회·역사·문화를 연결짓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 등을 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공학·화학을 전공, 연세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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