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층민 출신 엘가, 대영제국 음악 위풍당당하게 세우다

2025. 7. 2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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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요즘 영국 경제가 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격세지감이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힘이 센 나라였는데. 19세기에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은 제조업과 해상 무역의 최강국이었고 전 세계에 펼쳐진 제국의 영토 어딘가는 항상 낮이었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당시 영국은 모든 분야에서 일등이었다. 벤담과 밀은 공리주의를 제시하고,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리카도와 맬서스가 고전 경제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윌리엄 워즈워스, 바이런,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위대한 작가들이 등장했다.

작곡가 최초로 주요 작품 음반으로 남겨
영국 대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대영제국 위상을 드높이는 작품들로 명성을 떨쳤다. [사진 사회평론]
19세기 영국의 음악계 역시 활기가 넘쳤다.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맨체스터의 할레 오케스트라, 로열 스코틀랜드 국립 오케스트라 등 뛰어난 전문 오케스트라가 속속 창단되었으며,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로열 앨버트 홀 같은 대규모 공연장이 건립되어 갈수록 늘어나는 청중들의 음악적 욕구를 채워주었다. 영국은 특히 합창 음악을 선호해 오라토리오라는 자국만의 장르를 만들어 향유 했다.

문제는 제국의 위엄에 걸맞은 자국 출신의 음악가가 없었다는 것. 펠릭스 멘델스존이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엄연히 독일인이었다. 영국인이 가장 숭배했던 헨델 역시 귀화는 했으나 작센 공국의 할레에서 태어나고 자란 독일 출신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주요 국가들은 물론이고 동북부 유럽의 약소국가들조차 저마다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있음에도 영국은 17세기 말 헨리 퍼셀을 끝으로 내로라할 만한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식민지가 많아도 영국의 기가 죽을 수밖에. 영국의 숙원은 에드워드 엘가에 의해 풀렸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주류 작곡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엘가는 거의 독학으로 음악을 익혔을 뿐 아니라 그의 음악적 영감은 대부분 유럽 대륙으로부터 왔다. 게다가 그는 사회적으로도 비주류였다. 개신교가 지배적이었던 시절 엘가는 부모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피아노 조율사와 노동자의 딸이었던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하층민이었다.

음악가를 향한 그의 꿈은 절실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는 홀로 도서관에 있는 음악 이론 책들을 스스로 터득했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꿈을 접고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로 취업을 했다. 하지만 몇 달 만에 퇴사한 그는 대신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에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레슨, 성당 반주, 편곡, 지휘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했다. 이때의 생생한 경험은 그가 오케스트라 악기의 음색과 기능을 세부적이고 깊이 있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엘가의 아내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 [사진 사회평론]
가난했지만 엘가에게 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일푼이었던 32살, 그는 8살 연상의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와 결혼했다. 엘가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사랑을 키워 온 앨리스는 육군 장교의 딸인데다 부유한 귀족 출신의 개신교도였다. 무명의 가톨릭 음악가와의 결혼에 대한 신부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둘은 몰래 약혼을 했고 이때 엘가가 약혼 선물로 앨리스에게 헌정한 곡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고백, ‘사랑의 인사’이다.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많았던 앨리스는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엘가의 비서와 매니저 역할은 물론 비평까지 도맡아 평생을 “천재를 돌보는” 일에 바쳤다. 그녀의 사랑 덕분일까. 비록 더디기는 했지만 엘가는 작곡가로서 점차 주변에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42살이 되던 1897년. 일명 ‘수수께끼 변주곡’의 초연이 대성공을 거두며 엘가는 단숨에 영국 최고의 작곡가에 등극한다. 이 곡은 엘가의 지인 14명 각각에 대한 14개의 음악적 스케치이다.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고 이니셜이나 별명처럼 그들을 암시하는 단서만 적어두었기 때문에 이 곡은 원제인 “독창적인 주제에 의한 변주곡”보다 “수수께끼 변주곡”으로 불리고 있다. 이 가운데 아우구스투스 예거를 추억한 9번 변주 ‘님로드’는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연에서 엘가의 지휘로 연주된 이래 영국을 대표하는 추모곡이 되었고, 윈스턴 처칠 총리 장례식,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식은 물론 최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서도 울려 퍼졌다.

안토니오 무뇨스 데그레인의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의 대사에서 따왔다.
이때부터 엘가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위상에 걸맞게 제국주의 대영제국의 자신감과 위상을 드높이는 작품들을 쏟아낸다. 그 가운데 5곡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가장 유명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의 대사 일부를 따다 붙인 제목 ‘Pomp and Circumstance’처럼 웅장함과 장엄함이 압권이다. ‘위풍당당 행진곡’은 영국의 대표적 음악 축제인 BBC 프롬스에서 1905년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이후 매년 마지막 콘서트에서 연주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 곡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요청으로 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된 ‘희망과 영광의 땅’ 합창은 이후 국민 앤섬이 되어 영국 사람들이 공식 국가보다 더 자주 부르고 있다. 영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결혼식과 졸업식은 물론 대통령 취임식에서 ‘위풍당당 행진곡’보다 더 많이 연주되는 곡이 또 있을까.

그의 인기만큼 명예도 올라갔다. 엘가는 1904년 국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11년 공로 훈장을 시작으로 각종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케임브리지, 더럼, 리즈, 옥스퍼드, 예일, 애버딘, 웨스턴 펜실베이니아, 버밍엄, 런던 대학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예민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엘가는 갑작스러운 성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897년 ‘수수께끼 변주곡’으로 난생처음 국가적 인사가 되어 초대를 받았던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오찬에 당일 아침 불참을 통보한 사건은 유명하다. 이때 그가 보낸 카드에 “피아노 조율사의 아들이 참석해서 왕실에 불명예를 안기는 것을 아무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쓴 것을 보면 거듭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신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싶다.

왕실행사 당일 불참 통보한 사건은 유명
명성을 떨칠수록 압박감은 커졌고, 행복감은 사라졌다. 때로는 익살로 때로는 변덕스러운 신경질로 감추기는 했으나 그는 자주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 영국의 저명 음악학자 어니스트 뉴먼의 표현처럼 엘가는 “비밀스럽게 불행”했던 것이다. 독실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자주 자살 충동에 시달렸으며 종종 자기 분열적이고 모순적이기도 해서, 자신의 음악에 스스로 환호하다가도 이런 재능을 준 신의 섭리를 저주하기도 했다. 사생활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수수께끼 변주곡’을 발표하여 청중이 자신의 주변 인물을 파헤치도록 만든 것도 바로 그였다. 1920년 아내 앨리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슬픔과 상실감, 죄책감에 빠져 더 이상 작곡에 전념하지 못했다.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의 사후 엘가는 다양하고 독특한 취미 생활에 몰두했다. ‘엘가 황화수소 장치’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을 정도로 열렬한 아마추어 화학자였던 그는 뒷마당에 실험실을 차렸으며, 평소 즐기던 골프와 연날리기, 문장학 뿐 아니라 경마와 반려견, 오지 여행에도 빠져들었다. 상황이 이러니 새로운 걸작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시대의 흐름을 읽는 엘가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던 듯하다.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무빙코일 마이크의 등장으로 빠르게 개량되고 있던 축음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10년에 걸쳐 자신의 주요 오케스트라 작품을 녹음해 모두 음반으로 남겼다. 지금은 비틀스 팬들의 순례지가 된 애비 로드의 EMI 스튜디오가 1931년 역사적인 개관을 할 때 런던 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며 녹음 세션을 진행한 것도 엘가였다.

그리고 1934년. 엘가는 76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칭송도 점차 희미해졌다. 영국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과장되고 감상적인 음악들이 제국의 쇠퇴와 그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삶의 영광스러운 순간에는 언제나 그의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작곡가인지를 기억하는 이들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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