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카톨릭 식민지 국가로 만들 뻔한 남자’ 오다 노부나가 [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2025. 7. 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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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출처:야후재팬 화상]

국가공동체의 극심한 내부 분열은 외세를 유혹하고 종국에는 그들의 개입을 불러온다. 이런 외세의 힘을 등에 업고 이들과 결탁하여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사례는 일본 전국시대(1467년~1603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일본에 진출한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오다 노부나가의 유착이 그것이다.

‘천황가는 매관매직, 쇼균은 동가식서가숙’

무로마치 막부의 통치 시스템은 막부가 각 지방에 슈고다이묘를 임명하고 슈고다이묘들은 자기 대리인을 지역의 토호 가운데 선발하여 군역, 세금 징수 등을 관리하도록 하는 간접 통치방식이었다. 이 대리인을 슈고다이라고 불렀다. 막부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슈고다이묘들을 수도인 교토에 머물도록 의무화했다. 그런데 무로마치 중기에 이런 지배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오닌의 난’이다. 이 난은 차기 쇼군의 승계문제를 둘러싸고 유력 슈고다이묘인 호소카와 가문과 야마나 가문이 벌이는 권력투쟁으로 비화되면서 내전으로 발전하는 극심한 분열상을 드러냈다. 이때부터 무로마치 막부는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했다. 천황가를 지탱하는 조정은 궁핍한 재정 때문에 유력한 슈고다이묘에게 고위 관직을 주는 댓가로 돈을 받는 매관매직에 나서고 쇼군들은 교토에서 쫓겨나서 동가식서가숙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아마도 이때가 일본 역사를 통틀어서 외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가장 위험한 시기였던 것 같다.

▲ 예수회 소속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출처:야후재팬 화상]

노부나가와 카톨릭 선교사의 밀월

이틈에 슈고다이와 지역의 토호들은 자기 주군을 배신하며 자기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굳혀 나가는데 이들이 바로 ‘센고쿠다이묘’다. 그 대표적 인물이 오와리국(현재 아이치현)의 일개 가신에 불과했던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권력은 조총의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증한 인물이다. 조총부대를 편성하여 화력 집중 전법으로 상대방을 물리치는 그의 전술 구사는 기존의 기마부대 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큰 위력을 발휘했다. 조총에 쓰이는 화약과 탄환 제조의 필수 원료인 초석과 납의 확보가 시급했다. 이것들은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수입에 의존했다. 중국 마카오에 거점을 두고 중개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것을 일본에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납과 초석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일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왜냐하면 포르투갈 상인들에 대한 무역과 일본항구 입항허가권을 내밀하게 쥐고 막후에서 관리하는 자가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노부나가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1569년 어느 날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교토 니조성을 찾아 노부나가를 알현한다. 프로이스는 그 자리에서 노부나가에게 유리병에 담은 별사탕과 양초 등의 선물을 진상하여 그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일본 역사서에는 “노부나가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별사탕을 먹은 인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노부나가는 이 자리에서 선교사들에게 거주 및 포교의 자유, 의무 부과 면제 등의 내용이 담긴 윤허장을 발부했다. 그리고 교토에 3층짜리 성당 ‘난만지’ 건립도 도와주며 선심을 보였다. 이런 노부나가의 호의에 응답하고자 선교사들은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초석과 납을 노부나가에게 독점적으로 제공하여 군사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선교사들은 국내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한 ‘키리시탄 다이묘’들이 노부나가 진영에 가담하도록 설득하고 유도했다. 이런 양자 간의 밀월과 유착에 힘입어 일본에서의 카톨릭 신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582년에 약 15만명이었던 신자 수는 2년 후에는 30여만명으로 증가했고 포교 50년이 되는 1605년경에는 75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혼노지의 변 [출처 야후재팬 화상]

쌓아올린 공든탑, 무너지다. ‘혼노지의 변’

노부나가의 최대 반대 세력은 불교계였다. 그 당시 교토 인근 히에산의 사찰, 엔략쿠지는 고리대금업, 통행세 징수, 승병 조직 등 적폐의 본거지였다. 이런 행태에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노부나가는 엔략쿠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다음에는 셋츠(현 오사카)의 이시야마혼간지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이제 천하 제패를 위해 마지막 남은 상대는 서일본의 맹주 모리 데루모토였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가신, 하시바 히데요시(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내 정벌에 나섰다. 그리고 뒤이어 심복 아케치 미츠히데를 히데요시에 합세시켜 데루모토를 굴복시킬 심산이었다. 노부나가에게는 그의 숙원인 천하 제패가 목전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데루모토 정복을 위해 출동한 것으로 알았던 미츠히데가 휘하의 병사 3000여명을 이끌고 노부나가의 임시 숙소인 교토 ‘혼노지’를 급습하여 노부나가와 그의 적자 노부타다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본역사에서는 이를 ‘혼노지의 변’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에 진출한 선교사들이 35여년에 걸쳐 쌓아온 공든탑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이들의 구상은 노부나가가 일본 천하를 평정하면 그를 통해서 일본 전체를 카톨릭 국가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최종 목표인 명나라를 정복하는 일이었는데 그 첫 단계에서 좌절된 셈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이스는 혼노지 변이 발생한 지 6개월 후에 노부나가의 생전 발언이라면서 매우 주목할 만한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리를 정복한 뒤에 (내가) 일본 전체 66국의 절대 영주가 된다면, 시나(중국)를 무력으로 빼앗기 위해서 일대 함대를 편성할 것이며, (중국의) 여러 지역을 내 아들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나는) 먼저 일본 전체를 평정해서 이를 키리시탄(카톨릭 신도)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 시나를 정복할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노부나가는 정권을 잡은 뒤에 일본을 카톨릭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 당시에 카톨릭 선교사들의 해외 포교와 식민지 정복 활동은 동일시되는 개념이었기에 일본이 카톨릭 국가로 개종된다는 것은 곧 일본이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예수회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이교도들의 땅을 모두 정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선교사의 포교 활동은 곧 정복 행위를 의미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만약 노부나가가 선교사 세력 즉 외세의 지원을 받으며 천하를 제패하고 일본을 카톨릭 국가로 전환했더라면, 일본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카톨릭 세력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왜 미츠히데는 자신의 주군 노부나가를 살해했는지 그 진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만 난무할 뿐 진상 규명은 못 이뤄진 채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상태다. 하지만 경위야 어찌 되었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며 앞만 바라보고 질주하던 노부나가를 칼끝으로 멈춰 세운 미츠히데는 일본을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 ‘구원투수’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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