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115통… 두 천재가 편지로 주고받은 꿈과 우정[북리뷰]

2025. 7. 2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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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차된 편지들
앙리 미테랑 엮음│나일민 옮김│소요서가
중학교때 인연 맺은 졸라·세잔
졸라가 파리 이사가며 서신교환
“네가 떠난 뒤에 슬픔의 그림자”
“넌 내 청춘의 전부… 함께 성장”
세잔 살롱전에 탈락 음울한 때
졸라 “우리 둘은 혁명가” 응원
세간의 절교설도 거짓 드러나
1861년쯤 촬영된 폴 세잔의 사진(왼쪽 사진)과 세잔이 그린 에밀 졸라의 초상화(오른쪽). 졸라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앙리 미테랑은 ‘교차된 편지들’을 통해 두 거장이 30년간 주고받은 115통의 편지를 분석했다. 소요서가 제공

1852년 어느 날, 엑상프로방스의 한 중학교에서 두 소년이 만났다. 그날, 에밀 졸라와 폴 세잔, 두 거장의 우정이 시작됐다. 두 사람 차이는 컸다. 새침하고 몽상적인 졸라는 이탈리아 이주민 출신으로, 시 보조금을 받아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반면, 까칠하고 의심 많은 세잔은 지역 토박이로,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아들이었다.

운명처럼 같은 고향, 같은 학교에 다녔던 두 사람은 내적 고뇌와 예술적 사유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기록을 남겼다. 함께 주고받은 편지이다. 1858년 시작된 이 유명한 서신 교환은 열정적으로 주고받을 때도, 아예 끊길 때도 있었으나, 30년간 이어지면서 115통의 편지로 남았다. ‘교차된 편지들’은 졸라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앙리 미테랑이 그 전부를 시간순으로 배열하고, 상세한 해설을 부친 책이다. 그 덕분에 서한집을 넘어서 두 예술가의 공동 평전처럼 읽힌다.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천재를 이어준 건 예술에 관한 관심이다. 작문 수업 시간에 시로 재능을 드러낸 두 사람은 한순간 끌렸다. 세잔은 졸라를 알아봤고, 졸라도 세잔을 느꼈다. 외지인 졸라가 아이들 놀림감이 되었을 때, 세잔이 그를 구하면서 우정이 시작됐다.

“태양과 물과 책, 이 세 가지야말로 젊은 날의 졸라와 세잔을 키운 양분이었다.” 두 사람은 프로방스의 강물 속에서 같이 헤엄치고, 글 쓰고 책 읽고 그림 그리면서 우정과 예술을 익혀갔다. “눈은 자연과 접촉하며 스스로 배워간다.”(세잔) 두 사람은 자연의 장엄함에 매혹됐고, 대상을 단순 모사하는 평면적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예술적 구성을 통해 순간에 거룩함을 부여하는 시성(詩性)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시인이고, 내 작품은 위대한 교향악처럼 지어졌습니다.”(졸라)

남아 있는 첫 편지는 세잔이 보낸 것이다. 졸라가 학업도 못 마치고 파리로 이사한 지 몇 달 후였다. “네가 떠난 뒤, 친구여, 슬픔의 그림자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이별을 슬퍼하는 편지 뒤엔 진정한 삶, 예술적 삶을 향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졸라는 답했다. “자네는 내 청춘의 전부라네. 내 기쁨과 고통의 모든 순간에 관여하고 있지. 우리 정신은 우정 속에서 함께 성장했지.”

파리 빈민가의 문학청년 졸라는 빨리 유명 작가가 되어 돈을 벌고 싶었고, 억지로 법대생이 된 세잔은 강압적인 아버지 눈을 피해 화가가 되고 싶었다. 1861년 세잔이 파리로 오면서 둘의 명암은 엇갈린다. 졸라가 뛰어난 필력으로 이름을 얻는 동안, 세잔은 연이어 살롱전에서 탈락하면서 음울해진다. 세련된 처세로 예술계 중심에 진입하는 졸라의 눈부신 화려함과, 쏟아지는 비판에도 홀로 자기 예술을 지키려는 세잔의 완고한 어둠이 주고받는 편지 속에서 생생히 펼쳐진다.

인상파를 옹호하는 그의 유명한 비평들 속에서 졸라는 세잔 작품을 자주 언급하지 않았으나, 편지를 보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창조하는 모든 작품을 통해 강렬한 개성을 찾으려 했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둘이 혁명가가 되었다는 걸 아는가?” 두 사람은 동지였다. 졸라의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원초적 폭력성, 억압된 충동, 근원적 공포는 세잔의 초기작에서 보이는 인간 본능의 섬뜩함, 음울함과 무척 유사하다.

이처럼 이 책은 졸라와 세잔의 관계를 둘러싼 세간의 오해를 불식한다. ‘목로주점’으로 스타가 된 졸라가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세잔을 멀리했고, 더욱이 1886년 실패와 자살로 끝난 저주받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작품’을 쓰면서 세잔을 모델 삼아 그를 모욕했다는 것, 이에 세잔이 편지를 보내 절교했다는 건 유언비어에 불과했다. 성공한 졸라는 고향으로 돌아가 묵묵히 자기 작업에 몰두하던 가난한 예술가 세잔을 지원했고, 이 책에 처음 실린 1887년 편지에서 세잔은 졸라에게 만날 날을 기원함으로써 우정의 지속을 보여주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자유의 투사가 된 졸라가 갑자기 ‘의문사’하자, 소식을 접한 세잔은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만난 두 사람은 우정이 끄는 대로 나아가 각자 꿈꾸었던 바를 이룩했다. 졸라는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잇는 대작가가 되었고, 세잔은 현대 회화의 기준점이 되었다. 무명 시절, 자신의 글과 세잔의 그림을 묶은 책을 기대하면서 졸라는 말했다. “금빛으로 된 우리 둘의 이름은 ‘책의’ 첫 장에 하나 되어 반짝이고, 후세에도 늘 함께 전해질 거야.” 그 책은 안 나왔지만, 두 사람 이름은 예술적 우정을 기록한 이 책에서 함께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636쪽, 3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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