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돌린 구윤철, 빈손 귀국 위성락

김태준 기자 2025. 7. 25.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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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2+2 통상 협의’ 돌연 취소
구윤철, 출국 1시간前 통보받아
‘선물 더 갖고와라’ 압박 나선듯
24일 오전 한미‘2+2 협의’취소 통보를 받은 구윤철(왼쪽)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출국을 취소하고 인천공항을 떠나고 있다. 지난 20일 방미했지만 마코 루비오 미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을 만나지 못한 위성락(오른쪽)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오후 인천공항으로 귀국했다. /장경식 기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부과한 25% 관세의 유예 시한(8월 1일)이 일주일 뒤로 다가왔지만,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미국 측 카운터파트와 대면 협의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일본·필리핀·인도네시아는 최근 미국과 협상을 타결했는데, 한국이 줄곧 후순위로 밀리면서 한미 협상은 공전(空轉)하는 모양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 장관 등을 만나기 위해 24일 워싱턴DC로 출국하려던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인천공항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미국 측이 베선트 장관의 ‘긴급 일정’을 이유로 25일 개최 예정이었던 한미 ‘2+2(재무·통상)’ 협의를 막판에 취소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실무자 선에서 이메일로 취소를 통보한 것은 미국행 비행기가 이륙하기 불과 1시간여 전이었다.

그래픽=백형선

지난 20일 미국에 갔던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마코 루비오 미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 장관을 만나지 못하고 이날 귀국했다. 위 실장은 21일 루비오 보좌관을 만나러 백악관에 갔지만, 루비오는 트럼프와 회의가 길어진다며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미 측이 “대면 협의는 어렵다”고 통보해, 위 실장은 같은 워싱턴DC에 있는 루비오와 전화 협의를 해야 했다. 위 실장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과 면담했지만, 자신의 카운터파트는 만나지 못했다.

지난 23일 방미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러트닉 장관과의 24일(현지 시각) 만날 예정이다. 산업부는 지난 22일 방미한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도 그리어 대표 만난다고 밝혔다. 하지만 베선트 장관이 28~29일 스웨덴에서 미중 협상을 할 예정이라, 취소된 2+2를 다시 개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1일 취임 직후부터 루비오와의 통화를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않아, 이날 일본 외무상과 먼저 통화했다. 다음 주 방미해 한미 외교 장관 회담을 한다지만, 일정은 아직 조율 중이다.

◇경제·안보 수장 줄줄이 바람맞아… 압박 강도 높이는 美

한미 고위급 대면 협의가 이처럼 잇따라 불발·취소되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면담’ 자체를 협상에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는 정상회담이나 고위급 협의를 통해 이견을 풀어가려 하는데, 미국 측은 사전에 먼저 트럼프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숫자나 조건을 제시해야 ‘만나주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 우리 정부는 어느 정도 통상·안보 협의가 진행된 시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패키지 딜’을 타결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이달 초 방미한 위 실장은 지난 7일 루비오와의 면담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한미 정상회담을 해서 상호 호혜적인 합의를 만들어 나가자”고 했고, 미 측도 공감을 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무 협의에서 미국은 농축산물 시장 개방, 디지털 교역 확대 등 비관세 장벽을 해소하는 조치로 통상 협상이 타결돼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미국이 2+2 협의를 하루 전에 취소하고, 2박 4일간 워싱턴에 머문 위 실장을 만나주지 않은 것도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시장 개방 조치나 투자 계획을 갖고 오라’는 우회적 압박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위 실장이 루비오와 면담을 기다린 21~22일, 미국과 협상을 타결한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국무·국방장관도 만났다. 반면 한국 입장에서는 내달 1일 전 협상을 할 물리적 시간이 더 촉박해졌다. 협상 타결을 위한 ‘최종 관문’ 격인 트럼프 대통령은 25~29일 스코틀랜드를 방문할 예정이다.

23일 미국과 협상을 타결한 일본도 우리와 비슷한 ‘군기 잡기’를 겪었다. 트럼프는 지난 4월 백악관을 찾은 일본 협상 대표에게 자신의 정치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가 새겨진 모자를 씌워 사진을 찍게 했다. 협상이 정체되자 일본을 향해 “잘못 길들여졌다” “30~40년 동안 미국을 착취해 왔다” “버릇이 없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정부 소식통은 “비상계엄·탄핵 여파로 본격적 협상이 늦어지면서 한국은 ‘트럼프의 군기 잡기’를 데드라인이 임박한 시점에 겪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통상 USTR 대표가 전담하던 관세·통상 협상에 재무·상무장관을 투입한 것도 트럼프의 ‘전략’ 중 하나다. 미 언론은 트럼프가 협상 상대로부터 만족스러운 숫자를 받아오도록 베선트·러트닉·그리어를 경쟁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최종 결정자인 트럼프가 목표를 제시하면 세 사람이 모두 달려들어 상대를 압박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트럼프 대통령이 만족할 만한 ‘숫자’를 제시해야 협상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달 초 러트닉 상무장관으로부터 ‘일본과 같은 4000억달러 규모 투자 펀드 조성’ 요청을 받고, 이번 ‘2+2 협의’에서 대규모 투자를 제안할 예정이었다. 기업 직접 투자 규모만 1000억달러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또 제조업 협력을 주요 카드로 보고 있었다. 조선 등 군수 분야와 반도체·배터리 등의 첨단기술, 원자로 설계 및 MRO를 포함한 에너지, 인공지능(AI) 등 특정 분야의 협력을 논의해 나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통상 수퍼 위크’가 개막도 전에 김이 빠지면서, 한국의 이런 협상 방안을 대강 파악한 미국이 거절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한 전문가는 “회담장에 협상안을 들고 입장하기도 전에 ‘입구 컷’을 당한 것”이라고 했다. 쌀·소고기 같은 농축산물과 고정밀 지도 데이터 등 민감 품목에 대한 비관세 장벽 완화 조치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보도가 이어진 데다, 일본만큼의 투자 규모를 제시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분위기를 감지했을 것이란 평가다.

정부 고심은 깊어질 전망이다. 일본은 우리와 대미 무역 흑자 규모나 구조는 비슷하지만, 전체 경제 규모는 2.5배에 달하고 대미 투자액(2023년 누적·상무부 집계 기준) 역시 한국의 10배 수준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일본 수준의 ‘투자 숫자’를 제시할 수 없지만 일본 수준의 ‘관세율’은 받으려면 결국 비관세 장벽 민감 품목 등을 제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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