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땀 아래 피어난 초록잎 헐벗은 산에 새 생명 일구다

최현정 2025. 7. 25. 00:0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6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림이 푸르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종묘분야 일꾼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한국양묘협회가 펴낸 '한국양묘협회 50년사'에 따르면, 1961년부터 2010년까지 50년간 양묘협회 임업인들이 수급한 산림용 묘목은 77억 2000만본에 달한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61~2010년 양묘협회 77억본 수급
2010년 전체 묘목 생산량 82.6% 육성
국가 시행 ‘치산녹화사업’ 마을양묘 추진
고 이흥수씨 춘천서 1만여㎡ 양묘장 개설
아들 이영상씨 “시민 100명 함께 일해”
산림녹화 성공 이후 생산 줄어 관심 필요

[산림녹화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13. 양묘장의 일꾼들

▲1950년대 춘천에서 양묘장을 운영했던 고(故)이흥수씨의 아들 이영상 전 춘천시 노인회 수석부회장.

196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림이 푸르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종묘분야 일꾼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한국양묘협회가 펴낸 ‘한국양묘협회 50년사’에 따르면, 1961년부터 2010년까지 50년간 양묘협회 임업인들이 수급한 산림용 묘목은 77억 2000만본에 달한다. 산림황폐기로 불리는 1961년~1972년에는 아까시, 오리나무, 상수리, 낙엽송 등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 주로 이뤄졌고, 1973년부터 시작된 치산녹화기에는 산지복구조림을 위한 쪽제비싸리과 묘목 등과 함께 낙엽송, 잣나무, 산오리 등 경제림 조성을 위한 묘목이 길러졌다.

‘한국양묘협회 50년사’는 당시에 대해 “1960년대는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돼 시행되는 시기이고 조림 역사로 볼 때는 치산녹화계획이 수립되기 전인 녹화착수기에 해당하는 시기”라며 “이 때는 연료림 조성이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했다.

▲ 1960년대 이영상씨의 선친 이흥수씨가 운영하던 춘천 양묘장과 직원들의 모습. 이영상 전 춘천시 노인회 수석부회장 제공

이 시기에 양묘협회는 전체 묘목 생산의 절반을 담당하다가 2010년에 들어서는 전체 묘목 생산량의 82.6%에 해당하는 묘목을 길러냈다. 임업인들은 국가의 치산녹화 정책에 맞춰 우량한 묘목들을 지속적으로 생산, 공급하며 국토녹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우리나라 산림녹화는 특히 국가의 강력한 정책과 더불어 민간이 함께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양묘도 그랬다. 특히 마을 주민들의 호응이 높았다. 국가에서 시행한 치산녹화사업은 대대적인 마을양묘를 추진하게 했고, 해방 이후 먹고 살 게 마땅치 않았던 주민들은 사업장에 하나둘 모여들어 묘목 심는 일을 했다.

이영상 춘천시 전 노인회수석부회장의 부친 고(故)이흥수씨는 1950년대 춘천에서 약 1만3200㎡(4000평) 규모의 양묘장을 개설했다. 해방 전까지 일제가 운영하던 영림소에서 근무했던 그는 해방 후 사업장을 차려 50년 넘게 양묘장을 운영했다.

그의 아들 이영상씨는 부친을 도와 1962년부터 4년간 양묘장을 감독하는 일을 주로 했다. 이 씨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성수기 때만 되면 양묘장에 춘천시민 10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일하는 모습이 또렷이 남아있다. 그는 “당시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성수기 때만 되면 춘천시민 100명 가까이 양묘장으로 일을 하러 왔다”며 “초등학생들까지 동원돼 일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 도시가스가 집집마다 공급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으니 주민들이 다들 산의 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사용했다”며 “그 탓에 전쟁으로 초토화된 산은 더욱 황폐해졌었다”고 했다.

▲ 1960년대 이영상씨의 선친 이흥수씨가 운영하던 춘천 양묘장과 직원들의 모습. 이영상 전 춘천시 노인회 수석부회장 제공

이어 “그걸 복구하기 위해 양묘장에서 묘목들을 생산했는데, 그때 키운 묘목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산림녹화는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보험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침수라도 나면 양묘장을 운영하던 집은 큰 낭패를 봐야했다. 고(故) 이흥수씨가 운영하던 양묘장도 1963년 여름 물난리를 겪으면서 한 차례 큰 아픔을 겪었다. 1만3200㎡(4000평) 규모의 양묘장이 침수되면서 묘목들이 고사됐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소유한 땅 일부를 팔아야 했다.

1960년대 1년에 10억 6000만본까지 달했던 묘목 생산은 산림녹화 성공을 이룬 후, 이제는 1년에 4000~5000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우량한 묘목 육성은 기후 위기 속 산림의 미래, 나아가 ‘지속 가능한 산림경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필수 요소다. 최현정 기자

 

#양묘장 #구슬땀 #초록잎 #한국양묘협회 #산림녹화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