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7 정선 백운산: 구름의 한 시절
하이원리조트서 서정상 마천봉까지 7㎞
등산로 ‘하늘길’ 백운산 주봉까지 이어져
깔끔하게 정비된 초입 정갈한 돌탑 장식
산수국·말나리·비비추 등 야생화 생생
온통 운무에 휩싸여 북유럽 숲의 느낌
마천봉 2시간 소요 만항재까지는 10㎞
석탄 운반하던 길 ‘운탄고도’ 펼쳐져
지나간 시간과 미래 떠올리는 시간

그친 줄 알았던 비가 요 며칠 다시 추적추적 쏟아집니다. 절기상 엊그제가 소서(小暑)였는데 말입니다. 달력을 보니 어느새 7월 중순입니다. 무더위 속 삶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원하게 쉬었다 가라며 하늘이 하사하는 선물 같습니다. 하지만 집중호우로 인한 전국 수해 소식이 연일 끊임없이 들리니 마음이 천추를 단 듯 무겁습니다. 하루아침에 살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허망한 얼굴을 마주할 때면 감사했던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천재지변은 언제나 낮은 자리부터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높은 산이 재해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일부 국립공원의 출입이 통제됐다는 뉴스에 완전한 카오스가 찾아온 산을 상상합니다. 빗물에 쓸려 무너지고 주저앉은 산은 아마도 거칠고 사나운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구 헝클어져 있을 산은 우리에게 어떠한 야생의 말을 건네올까. 궁금합니다. 도리어 지금이야말로 산에 가야 할 때라는 무모한 욕구가 강하게 듭니다. 날씨가 침착하기를 기다리다가 등산 배낭을 꾸려 밖으로 나섭니다.

이번 달은 버스를 타고 정선으로 향합니다. 지난해 이맘때 민둥산에 다녀온 이후 모처럼 다시 찾은 정선입니다. 일부러 가겠다고 계획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확하게 1년 간격으로 찾아온 형국이라 이 계절이 정선과 도대체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나의 무의식은 왜 하필 7월이면 정선을 가장 먼저 부르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니 목적지인 고한·사북 공영버스터미널입니다. 원주에서 이곳까지 겨우 1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데에 한 번 더 놀랍니다.
사북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동네입니다. 1995년 KBS에서 방영한 하희라, 이종원, 전도연, 배용준 주연의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의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북 탄광촌과 서울을 오가며 출세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야망과 배신을 다뤘던 이 드라마는 무려 시청률 62.7%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도시에 온 것 같으면서도 유년 시절의 기억 어딘가를 방문한 기분이 듭니다. 살아본 적도 없는 동네에서 아련한 향수를 느낍니다.

오늘 오를 산은 정선 고한읍의 백운산입니다. 전국에는 수백 곳의 백운산이 있습니다. 정선만 해도 신동읍에 백운산이 한 곳 더 있고요. 가까운 영월과 원주, 제천에도 백운산이 있습니다. 주말마다 백운산이라는 이름의 산만 찾아 오른다 해도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아마 다 못 오를 것입니다. 백운산이 많은 이유는 붙이기 쉬운 이름이라서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백운산은 풀이하면 ‘흰 구름’ 산인데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산이 마치 구름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백운산 등산은 하이원리조트에서 시작합니다.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변신해 많은 인파가 몰리는 이곳은 지대가 서늘한 까닭에 여름 휴가지로도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마침 휴가철이라 리조트 곳곳에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한가로이 피서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정상 마천봉까지는 약 7㎞쯤 됩니다. 하늘길이라는 어여쁜 이름의 등산로가 백운산 주봉까지 이어집니다. 3년 전 부모님과 함께 곤돌라를 타고 단숨에 산정 근처까지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스키장에서 관할하는 산인 만큼 등산로는 초입부터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습니다. 군데군데 쌓은 돌탑은 어쩐지 주술적인 느낌보다 장식적인 느낌이 더 강합니다.
하지만 이 산 특유의 신비로운 느낌은 억지로 꾸미거나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깨끗한 땅에서만 자생하는 고사리, 고원 습지에서 볼 수 있는 이끼 등으로 산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산수국, 말나리, 비비추 등 이즈음에 볼 수 있는 야생화가 더없이 반갑습니다. 전날 내린 폭우로 산은 더없이 산뜻합니다.
오가는 길에 스치는 사람들은 산책을 나온 듯 차림새가 가볍습니다. 아마도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산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산은 산의 매력을 만나기에 충분합니다. 한동안 넓은 길을 걷다가 이내 연못이 나와 잠시 쉬었다 갑니다. 백운산이라는 이름답게 온통 운무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치 북유럽의 숲에 들어와 있는 착각도 듭니다. 그렇게 산에 홀린 채로 2시간을 정신없이 보낸 뒤 이윽고 백운산 마천봉에 도착합니다. 날이 개지 않아 도리어 좋았던 시간입니다.

산은 더 이어집니다. 만항재까지는 10㎞이지만 더 나아가지 않고 그저 이 산이 간직하고 있는 여운 속에 조금 더 머물고 싶어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그저 두 다리가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운탄고도(運炭高道)’라는 이름의 길입니다. 이름대로 과거 이 일대가 석탄 산업으로 부흥을 이뤘을 때 석탄을 운반하던 길이지요.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누구도 이 길을 찾게 되지 않을 무렵 길은 서서히 다시 태어났습니다. 조금 전 제가 온몸으로 누린 천연의 자연이 아마 그 반영일 것입니다.
어느덧 오후에 이르고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 사이로 말간 태양이 약속처럼 자취를 드러냅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태양인가. 햇살이 비치는 먼 곳의 산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봅니다. 저 너머로 이제 무엇이 올 것인가. 비와 함께 나의 한 시절 또한 이렇게 지나가는 것인가. 바야흐로 ‘구름의 한 시절’.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리조트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갑니다. 6시 막차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이제 여름은 점점 더 무르익을 것이고 그만큼 나의 간절함도 깊어질 것입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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