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에세이] 당신이 떠난 자리에 밤꽃이 피었습니다- 김기홍(시인)

knnews 2025. 7. 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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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열다섯에 가장이 되었다.

여동생 유학비를 위해 정작 자신의 두 아들에게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새 옷을 사 입힌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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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열다섯에 가장이 되었다. 그와 여동생은 큰집에 맡겨졌고, 누나는 서둘러 시집을 가야 했다. 쫓기듯 시집간 누나가 늘 가슴 아파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호떡 장사하는 누나를 위해 손수레를 끌고 반죽을 해줬던 친구다. 첫 월급을 타서 누나에게 냉장고 선물한 게 제일 잘한 일이라고 이야기하던 친구. 여동생 유학비를 위해 정작 자신의 두 아들에게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새 옷을 사 입힌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는 이발비로 6000원 이상 지급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어려운 중에도 이용료를 아껴 매달 2만원씩 작은 나눔을 실천했던 따뜻한 친구였다.

전화가 왔다. 큰애 군대 가기 전 휴가 겸 함께 여름을 지내자고 한 약속 지킬 수 없게 되었다며 목소리가 떨린다. 소화가 안 돼 찾은 병원에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석 달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남의 일 같고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그와 내가 많이 닮았다는 것을. 두 아이의 아버지며 장남이었고 자신을 누르며 과도하게 많은 것을 지고 왔다는 것을.

간헐적으로 연락이 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성묫길에 아들 몰래 읍내에서 밤나무를 사고, 어머니 산소에 심은 이야기도 했다. 눈이 침침해 글자가 안 보인다고, 아내가 휴대폰을 주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목욕탕서 아들이 등 밀어준 이야기며, 아내가 잠들기 전 제 배를 만져주고 시를 읽어준다고 자랑했다. 그가 이야기한 석 달이 지나고 있었다. 녹음이 짙어질 무렵 연락이 왔다. 암보험에서 꽤 많은 돈이 나왔다고. 절반은 병원비와 장례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는 아파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의 누나가 반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족들은 자기의 의사를 존중해준다고 했다.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 건 재산이 아니라 꿈, 세상을 향한 열정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몇 개월 소식이 없었던 중 올해 신정에 연락이 왔다. “석 달 시한부를 받고 마음이 단단해졌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고 다섯 달을 더해 해가 바뀌니 욕심이 생깁니다. 모르핀을 투여하고 정신이 아득할수록 아내 손을 더 꼭 잡습니다. 아직 욕심이 남았는가 봅니다. 선생님 무섭습니다.” 이 대화가 그와 나눈 마지막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헬렌 켈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를 당신을 통해 배운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밤꽃이 피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아련한 향수로, 누구에게는 가시로 박혀 오랫동안 함께 할 것입니다.’ 유고 시집에 남긴 내 마지막 작별 인사다.

김기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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