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경체] 역세권 대신 '궁세권'…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영끌족'은?
[EBS 뉴스]
서현아 앵커
우리 경제 뉴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 바로 부동산입니다.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시민들에게 중요하고 민감한 주제인데요.
조선시대에도 집과 땅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청소년 경제 체력 기르기 프로젝트, 오늘은 이한 역사 커뮤니케이터와 함께 조선시대 부동산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은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죠.
하지만 치솟는 집값에 서울, 수도권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은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시대 한양의 집값은 어떠했나요?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조선 때 가장 집값이 비싼 곳은 역시나 수도였던 한양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수도를 정한 이래, 지금까지 500년 넘게 한양의 집값은 계속 상승했습니다.
당연하지요, 한양에는 왕을 비롯해 고위 관료들이 살았고, 출세의 관문인 과거시험은 한양에서만 치러졌으며, 돈과 물자가 모이면서 문화와 예술도 발전해서 누구나 한양에 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한양은 동대문, 남대문을 비롯한 4대문 안 뿐이라 지금의 서울특별시보다 훨씬 좁았습니다.
그래서 한양은 일찍부터 과밀도시였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구하지 못해 남의 집을 빌려서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서현아 앵커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언제나 범죄가 함께 하곤 합니다.
지금도 전세사기나 깡통전세 등 주택 관련 사고와 범죄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당시에는 어땠습니까.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이게 좀 안타까운 일인데요, 그런 나쁜 일은 지금도 있지만 그 때도 있었습니다.
워낙 한양에서 집을 구하기 힘들다보니 남의 집을 빼앗는 일도 벌어졌는데 여가탈입이라고 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이제 내 집이다!"하면서 집주인을 내쫓는 겁니다.
그리고 전세사기도 있었습니다.
정조 때 노상추는 한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더 많은 방세를 주겠다는 사람에게 방을 넘긴 겁니다.
그런데 옮기라고 한 방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있어 이사갈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집주인은 돈이 없다며 집세를 안 돌려주려고 해서, 그야말로 거리에 나앉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노상추는 이사갈 방을 겨우 구했고, 집주인과 싸워서 돈을 받아냈지만, 이건 그가 관리였기에 가능했지 힘 없는 사람은 어려웠겠죠.
서현아 앵커
또 최근 '영끌'이라고 하죠.
한계까지 대출을 받아 집을 사거나 투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조선시대에도 '영끌'로 집을 산 사례가 있었을까요?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언제나 사람들은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했고, 그러다가 과욕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조 때의 양반 유만주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직업이 없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높은 관리가 되자, 유만주는 친척과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지금 명동의 100칸의 대저택을 삽니다.
크고 좋은 집에서 너무 살아보고 싶었던 거지요.
집 값은 2000냥, 한 가족이 25년을 살 수 있는 비용이었다지요.
아버지는 펄쩍 뛰며 집을 팔라고 했지만, 유만주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벼슬을 잃었고, 유만주는 1년만에 큰 손해를 보고 작은 초가집으로 이사갑니다.
그리고 얼마 뒤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선택이 어리석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했던 거죠.
서현아 앵커
동서고금 어떤 정부든 부동산이 여러 사회,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다 보니 집값 문제를 잡기 위해 여러 조치를 하기 마련인데요.
집값 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 정부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한양은 이미 좁고, 아파트가 없었기에 주거 공간을 더 늘일수는 없다 보니, 권력자들이 남의 집을 빼앗는 일은 계속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아예 문제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해 관리들이 한양에서 세들어 사는 것을 아예 금지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좌의정 조태억은 한양 바깥에서부터 멀리 출퇴근을 해야 했습니다.
좌의정인데도요.
보다 못한 영의정과 우의정이 특별히 집을 구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부탁했지만, 영조는 예외를 만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좌의정이 한양에서 셋집을 못 구하는데 그 아래 신하들이 구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지방 출신 관리들은 한강변이나 남산 기슭의 움막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좀 너무했다 싶지만 그만큼 남의 집을 빼앗는 일이 많았다는 거죠.
서현아 앵커
앞서 한양이 에부터 과밀도시로 유명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도시가 팽창하면서 재개발도 불가피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개발 때문에 집이 철거되는 일이 있었을까요?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지금은 지하철이 만들어지거나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면서 지역이 개발되지요.
조선시대에는 그런 일은 좀 적었지만, 가끔씩 재건축이 벌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왕의 자식들이 결혼할 때였습니다.
세자를 제외한 왕자, 공주들은 결혼하게 되면 궁궐 밖을 나가서 살아야 했는데, 왕은 자식들을 위해 훌륭하고 좋은 집을 주고 싶어했지요.
하지만 한양에는 이미 사람과 집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원래 있던 집들을 부수고 왕자와 공주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나 둘이 아니라 30채, 50채 씩을 허물고 아주 큰 집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자식이 많으면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물론 집주인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큰일이었지요.
나라의 법에는 왕족의 집 크기에 제한이 있었고, 신하들도 왕족들의 집을 너무 크게 짓지 말라고 했지만,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문종도 "딸이 결혼하는데 새 집을 지어줘야지…"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가장 심했던 것은 폭군 연산군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냥을 하고 놀기 위해, 또 궁궐 주변에 백성들이 사는 게 싫다며 궁궐 근처의 집들을 모두 철거하기도 했습니다.
서현아 앵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집을 '좋은 집'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한 역사커뮤니케이터
지금의 좋은 집이라면 역시 이름있는 아파트, 그리고 좋은 입지, 또한 학군지겠지요?
지금이 역세권이라면 그 때는 궁세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고급주택가는 바로 지금의 북촌, 경복궁 옆의 한옥집들입니다.
지금 가보면 아기자기하게 작은 한옥들이 있습니다만 이것도 새로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는 수백칸에 이르는 거대 주택들이 잔뜩 들어서 있어 아주 웅장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좋은 집의 조건은 아름다운 정원이었습니다.
안평대군의 집 옥계정사는 정원에 폭포가 있고 새벽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신선이 사는 곳 같은 풍경이 펼쳐져 졌고, 당연히 집이 넓은 것도 중요했는데, 정명공주의 집 사의당은 400칸이나 되는 대저택이었습니다.
도저히 현대인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규모이지요.
사실 집은 의식주 중 하나이고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너무 비싸지다보니 가장 가지기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지만, 여기에 욕심이 얽히면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은 다른 건 몰라도 햇볕이 잘 들고 안전한 곳에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서현아 앵커
집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인 만큼, 나만의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부동산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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