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을 무치며

말간 해가 부엌 창으로 살풋 인사를 건네는 아침. 오이 향이 좋다. 초록의 숲 향기가 난다. 사각사각, 도마 위에서 어슷하게 썰리는 소리가 생생하다. 잘 익어 아삭한 사과를 한 입 베어먹는 소리 같다. 젊어서는 노각을 외면했다. 파란 오이를 두고 누렇고 못생긴 늙은 오이를 왜 먹나 의아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알아버린 맛이다.
노각은 그물 모양의 거친 생김새 때문에 마트에서 사람들의 손길이 오이에 밀린다. 그러나 정작 맛을 보면 그 식감에 반한다. 두꺼운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을 드러낸다. 이에 유혹당하여 한 조각 집어 먹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약하게 시큼함이 느껴지고 예민한 사람은 비릿한 향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금을 뿌려 절이면 야들해진다.
이제 물에 씻어 물기를 짜면 갖은 양념이 들어갈 차례다. 별맛이 없던 오이가 양념에 버무려져 빨간색으로 변신을 하는 순간 맛에 마법이 일어난다. 물을 잔뜩 머금고 있는 노각의 청량감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먹을 때 소리도 그 맛을 잇는다.
오늘도 행정안전부로부터 3통의 메시지를 받는다. 폭염으로 외출 및 야외작업을 자제하라는 당부다. 이런 날씨가 이어지면 입맛도 떨어지고 쉽게 피로해진다. 이럴 때 오이가 한몫을 한다. 체내에 열을 식히고 수분을 보충하는데 이보다 좋은 채소가 없다. 전통 식생활에서도 더위를 다스리는 음식으로 여겼다고 한다.
오이의 원산지는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 산기슭이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하여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는 해동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1,500년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흔하다.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지라 우리 채소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오이는 잎겨드랑이에서 노란 꽃이 피는데 한 포기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다. 수꽃만 피다가 10마디가 넘게 자라면 암꽃이 피기 시작하여 그 밑에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난다. 씨방이다. 또 환경에 따라 암꽃이 많이 피기도 하고 수꽃이 더 많이 피기도 한다. 날씨가 서늘하고 해가 짧아야 암꽃이 많이 핀다.
오이는 속전속결의 채소다. 성장 속도가 매우 빨라 꽃이 핀 뒤 15일이면 수확을 한다. 겉은 딱딱하고 단단하면서 약간 푸른 오이가 맛이 있다. 식감도 이때가 최고다. 늙은 오이는 껍질을 버리고, 씨앗을 버리고 뽀얀 속살이 남겨진다. 젊어서는 모르는, 지긋해져서야 느껴지는 맛이다.
항암을 한 그이의 온몸에 열꽃이 빨갛게 피었다. 동백꽃 같기도 배롱나무꽃 같기도 한 무늬가 피어났다. 이 꽃들을 지우려 노각을 떠올렸다. 체온을 내려주고 열을 식혀주는 채소임을 알았던 터라 껍질을 벗겨 즙을 낸다. 그 즙을 발라보지만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다. 타는 가슴도 꽃 위로 빨갛게 피어오르고 있다.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있으랴. 항암 부작용이 들을 리가 있는가. 오늘이 처음이라 우왕좌왕하는 내 나이는 환갑이 코앞이다. 겉이 거칠고 투박한 노각과 닮아있다. 양념에 새로이 태어나는 늙은 오이처럼 내 삶도 희로애락(喜怒哀樂)에 고루 어우러져 멋진 나이가 되었을까. 맵지도, 짜지도, 쓰지도 않은 적당한 맛을 내고 있을까.
어쩌면 오늘은 쓴맛을 내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처음 살아볼 내일은 단맛일지 누가 알겠는가. 신만이 알고 있는 내일이다. 비록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더라도, 이리도 오이 향이 싱그러운데. 포개지는 일상에 나태해지는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니 살아보자. 살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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