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난파선이 들려주는 인류 문명사…'바다가 삼킨 세계사' 출간

곽성일 기자 2025. 7. 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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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기빈스, 30년간 수중 탐사 자료로 선사시대부터 2차대전까지 12척 난파선 분석
아테네 포도주 문화부터 당나라 해상 실크로드까지…교과서와 다른 문명 교류사 재구성
바다가 삼킨 세계사 표지.
문명의 이면에서 조용히 침잠했던 12척의 난파선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말을 건다.

『바다가 삼킨 세계사』(다산초당 刊)는 난파선이라는 독특한 타임캡슐을 매개로 인류 문명의 결정적 장면들을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 데이비드 기빈스는 영국의 해양 고고학자이자 소설가로, 실제 수중 탐사를 기반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문명의 흔적을 바닷속 유물에서 추적해왔다.

이 책은 그가 30여 년간 수집한 난파선 자료 중 12건을 정리해, 선사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결과물이다.

△포도주에 취한 도시, 침몰한 배가 들려주는 아테네의 식문화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는 1996년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텍타쉬 난파선' 이야기다. 이 배에는 당시 아테네로 향하던 에리트라에산 포도주를 담은 암포라(항아리)와 함께, 잔과 사발, 향유병 등 토론과 연회를 위한 도구들이 대거 실려 있었다.

저자는 이를 통해 단순한 무역을 넘어, 포도주가 문화와 철학의 일부였던 아테네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함께 마신다'는 뜻의 심포지엄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적 담론의 장이자, 그리스 고전정신의 정수였던 셈이다. 난파선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한 문명의 세계관을 품고 가던 배였다.

△청동기와 당나라, 그리고 유럽 문명의 연결고리

책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 바닷속에 잠든 유물들을 통해, 우리가 교과서로 익히는 역사와는 다른 궤적을 제시한다. 예컨대 1992년 영국 도버 해협에서 발견된 '도버 보트'는 단순한 선박이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교역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또한 1998년 인도양에서 발견된 '밸리통 난파선'은 당나라의 도자기, 유리, 향신료 등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해지는 초국적 문명 교류의 증거로 등장한다. 이 배 한 척은 실크로드보다 더 강력한 '해양의 실크로드'였던 셈이다.

△침몰한 배들이 경고하는 오늘의 제국들

책은 단순히 유물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구조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로마 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세베루스 황제의 화폐 정책은 오늘날의 초강대국이 안고 있는 금융 위기와도 닮아 있다.

"은화의 은 함량을 줄이고, 통화량을 늘려 군대에 지급한 세베루스의 정책은 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출발점이었다."

저자는 이를 현대 국가의 과잉 부채와 통화 팽창에 빗대며, 바다가 품고 있던 경고음을 꺼내 놓는다.

△해저의 암흑 속에서 되살아난 인류의 문명

『바다가 삼킨 세계사』의 가장 큰 강점은 유물을 통해 '살아 있는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문헌과 기록 위주의 역사 기술에서 벗어나, 실제 물질적 흔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과 감정, 선택의 흔적을 되살려낸다.

난파선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의 결정적 순간, 문명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바이킹의 '롱십'이 기록한 해상 팽창, 20세기 나치의 'HSM 테러호'가 증명하는 경제적 패닉, 심지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먼 항해에 나섰던 사람들의 흔적까지.

이 책은 바다 속에서 인류가 품었던 욕망과 두려움, 위기와 창조를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