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자연이 만난 '진짜' 남도답사 1번지

임창균 2025. 7. 2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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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 여행 20] 강진 사의재~영랑생가~강진만
다산 심신 달래주던 주막 그대로
200년 지나 전해진 남도의 맛
강진 신교육 발생지 ‘금서당’
영랑생가 곳곳 아름다운 시비
강진만생태공원서 생태탐방도
금서당 모습

전남 강진은 유홍준 교수의 책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통해 관광지로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전국적인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 책에서는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명명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중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에 답사 열풍을 따라 학교에서 강진 여행을 다닌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 속 강진은 다산초당과 영랑생가 딱 두 개로 정리되던 곳이었다.

강진은 외지인이 이름 지어준 '남도답사 1번지'를 '진짜'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 숱한 노력을 해왔다. 백련사, 사의재, 청자 도요지, 가우도 등 강진에 묻혀있던 여러 문화자산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강진 반값여행'이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20여년 만에 관광버스가 아닌 내 발로 걸어본 강진은 정약용과 영랑만 있는 것이 아닌, 맛과 멋,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었다.

◆ 200년 넘어 전해진 저잣거리의 맛과 정

강진버스터미널에서 중앙로를 따라 5분 정도 걷다 보면 1960년대 강진의 모습을 재현한 '청춘극장통'이 등장한다.

현재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바뀐 '모란다방'에서 북쪽으로 200m 가량 뻗은 골목에는 다양한 식당과 가게, 막걸리 체험 전시장, 사진관, 볼링장, 이발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강진의 문예지 '모란촌'이 탄생한 모란다방뿐만 아니라, 1962년 문을 연 강진 최초의 극장인 강진극장, 강진 최초 술 제조공장인 '은하소주'가 있던 곳이다. 과거 강진 상권의 명동거리라 할 수 있다.

당시 강진군 인구는 12만명이 넘을 정도였는데, 강진극장에서는 하춘화 등 인기가수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극장은 현재 볼링장으로 바뀌어 여전히 많은 군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청춘극장통에서 다시 5분을 걸어가면 1960년대 상점가의 모습에서 벗어나 조선시대 저잣거리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귀양 온 후 처음 4년간 지낸 사의재다.

정조가 세상을 뜬 후 당파싸움으로 인해 귀양길에 오른 다산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간 강진에서 살았다.
사의재 앞 청조루
사의재 주막과 주모 동상

다산은 '사의재기'를 통해 자신이 처음 지냈던 주막집 골방에 대한 글을 남겼다.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다스리기 위해 네가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자신이 살던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붙였다.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등 이 네가지 행동을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강진군은 오랜 고증을 거쳐 2007년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현재는 '동문매반가'라는 이름으로 '사의재 주막'으로 운영 중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충신이던 다산은 대역죄인으로 몰려 지친 몸을 이끌고 강진에 도착했다. 주막집 주모와 딸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은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했다.
사의재 주막에서 먹을 수 있는 일명 '다산 정식'

현재 식당에는 '다산 선생님께서 즐겨 드시던 밥상'이라며 아욱된장국과 바지락전이 함께 나오는 구성이 정식처럼 나온다.

간장으로 조린 마늘쫑,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 파란 열무김치, 바지락과 함께 무친 죽순나물 등 여행지 식당에서 접한 음식들이 집 반찬 마냥 입에 착 달라붙는다. 두툼하고 폭신한 바지락전을 간장에 찍어 먹고 된장국에 후루룩 밥을 말아 먹다 보면 어느새 속은 든든해진다. 1박을 했다면 여기에 막걸리를 한잔 했을 테지만 초여름 도보 여행의 고충을 고려해 기어이 유혹을 참아낸다.

200년의 시간이 지나며 음식의 종류도 만드는 방법도 달랐을 테지만, 당시 다산을 받아준 주모 할머니의 손맛도 당연히 좋지 않았을까. 귀양으로 심신이 지친 다산을 다시 일으켜 준 것은 이날 내가 먹은 남도의 손맛과 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 돌담과 그림, 꽃에 취하는 마을 길

사의재 주막을 나서서 돌담길을 걸어간다. 사의재에서 조금만 걷다 보면 우측에 개인 미술관인 강진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한국 근대기 6대 부호인 동은 김충식 별장과 김재영 관장의 개인 소장품이 있는 곳이다. 동은은 지역 인재 양성을 위해 강진유치원과 강진 농업고를 건립해 기부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진미술관 옆 정약용 동상 뒤로는 사의재가 내려다보인다.

미술관 본관 건물 앞으로는 거대한 세종대왕 동상이, 옆으로는 정약용 동상이 서 있다. 건물 주변으로는 나무화석인 '규화목'이 전시돼 있다.

건물 뒤편 언덕에는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34호인 동은의 별장이 있는데 이 곳은 임방울, 이화중선 등 전국의 유명 국악인들이 경연을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전시관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폭이 10m는 넘어 보이는 장엄한 풍경화들이 펼쳐진다. 평소 접하기 힘든 크기에 압도되다가도 천천히 걸어가며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풍경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강진미술관을 나서 걷다 보면 또 오른편에 이름 없는 작은 공원이 있다. 해남세무서 강진지서 뒤 쪽에 있는 이 공원은 충혼탑과 영랑생가 방면으로 가는 경유지기도 하다.

잠시 휴식을 위해 발걸음을 멈추고 강진읍내의 풍경을 내려다보는데 어디선가 달큰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평소 꽃과 나무에 큰 관심이 없지만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서야 이 하얀꽃의 이름이 치차나무꽃인 것을 확인했다. 한방에서는 열매가 불면증과 황달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향이 매력적인 꽃인 줄은 처음 알았다. 6~7월에 꽃이 핀다고 하니 돌아가서도 주변을 잘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영랑을 따라 강진을 굽어보다

공원을 지나 충혼탑을 지나면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렇게 영랑생가가 눈에 보일 찰나, 담벼락에 붙은 마을 지도를 확인하니 지나칠 뻔한 곳이 있었다. 우측으로 발길을 돌려 40m 정도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잔디밭과 함께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 하나가 보인다. 분명히 한 건물인데 왼쪽이 조선후기나 일제강점기 느낌이라면 오른쪽은 1950년대에 지은 느낌을 준다.

이곳 '금서당'은 강진 중앙초등학교의 전신으로 강진 신교육의 발상지로 불린다. 1905년 사립금릉학교로 문을 열고, 1914년 세무서 객사 위치로 옮겼다가 1926년 현재의 강진중앙초 자리로 이전했다. 영랑 김윤식도 이곳 금서당 출신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파됐는데 이를 구입한 것이 미술교사이던 완향 김영렬이다. 완향은 이곳을 직접 보수하고 유화 작품 활동을 하는 작업실로 이용했다. 후에 강진문화원 부원장을 지냈으며 원로작가 초대전 등 수많은 전시를 열고 2003년 작고했다.

현재 이곳은 완향의 아내인 박영숙(85)씨가 살고 있으며, 호주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아들 김경섭(57)씨도 종종 한국에 들어와 관리하고 있다. 정원의 나무를 다듬고 있던 김씨는 이곳까지 찾아온 필자에게 도리어 고맙다며 시원한 약수 한바가지를 건네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김씨에게도 걱정이 많았다. 연로한 어머니가 사시기엔 힘든 것은 둘째치고 이곳에 보관 중인 아버지의 작품들을 옮길 곳도 없다. 완향의 작품 중에는 아내와 함께 팔도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쌓은 작품이 많다. 금서당은 강진의 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김씨에게는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집이자 아버님과의 추억이 서린 장소다. 김씨는 어머니 생전에 아버지의 작품들이 다른 곳에서라도 빛을 보고, 금서당 건물이 제대로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랑생가 곳곳에 있는 시비

금서당을 둘러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면 1930년대 시문학파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시문학파기념관과 영랑이 태어나고 살며 수 많은 작품을 썼던 영랑생가가 있다.

1903년 이곳에서 태어난 영랑은 강진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했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일 일어나자 강진으로 내려와 4.4 독립운동 주도해 대구 형무소 등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30년에는 '시문학'지를 창간하며 당대 최고 시인들과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입은 부상으로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영랑은 이곳에서 불후의 시들을 남겼으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 외롭고 의로운 조선인으로 살았다. 곳곳에는 교과서에서 익히 봤을 법한 영랑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라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를 썼던 그 심경을 이곳 생가에서 헤아려 본다.
세계모란공원에 핀 모란

◆ 꽃피는 정원과 자연이 숨 쉬는 강진만

'모란이 피기까지는'가 쓰여진 영랑생가 뒤편으로 바로 세계모란공원이 이어진다. 모란은 5월에 꽃이 피지만 개화기간이 일주일 정도로 짧은 것이 단점이다. 이에 강진군은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온실 기술을 적용해 '사계절 모란원'을 조성했다. 한국 토종모란을 비롯해 미국,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일본, 독일 등 세계 여러나라의 모란과 아열대 식물을 볼수 있다.

온실 밖 야외 잔디광장에서는 이미 개화기간이 지나 모란을 볼 수 없었지만, 모란을 표현한 여러나라 문인들의 시를 읽어 볼 수 있다. 미국 여류시인 로버트 브라이의 '모란이 필 때'에서 모란은 칠흑 같은 세상에 많은 이의 힘을 북돋는 존재고,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는 봄이 지나고 그릴 수 없는 모란을 빗대 모란 그림으로 유명했던 북제의 화가 양자화를 떠올렸다.
강진만생태공원 풍경
강진만생태공원 갈대밭 데크길

강진 읍내에서 여정을 마칠 수도 있지만 강진만생태공원도 가볼 만하다. 탐진강과 강진천이 만나 강진만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강진만생태공원은 뱃모양의 남포호 전망대, 거대한 고니 조형물, 3㎞ 길이의 생태탐방로 데크길, 생태홍보관을 갖춘 공원이다.

생태공원에 들어서기 전 '두바퀴로 그린 자전거 여행센터'에서는 1천원으로 3시간동안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는데 강진만 해안도로와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다산박물관과 가우도 출렁다리까지 가볼 수도 있다.

남포호 전망대 아래 데크길로 내려가면 갈대밭 사이 갯벌에서 뛰어다니는 짱뚱어와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인 붉은발말똥게를 볼 수 있다. 조용히 갈대밭 사이 데크길을 걷다 보면 평소 산이나 공원에서는 들을 수 없던 다채로운 생물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 강진만은 남해안 하구에서 가장 많은 1천131종의 생물이 살고 있는 생태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생태홍보관 앞 갯벌에 있던 왜가리는 20m 정도 다가가자 귀찮은 듯 날개를 펴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생태홍보관은 현재 임시개관 중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준비 중이다. 전망대에서는 사계절 사진과 함께 갈대군락지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생태전시실에서는 강진만의 형성 과정과 다양한 갯벌 생물들을 홀로그램으로 보여준다.

해 질 무렵 노을이 가져다주는 풍경이 뛰어난 만큼 강진 여행의 마무리는 이곳 강진만생태공원에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글·사진=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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