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마법… ‘새로운 나’ 깨닫게 해줘”
6년만에 개인전 개최 주목
‘세계는 세계화한다’ 주제로
조각·회화·드로잉 27점 전시
“조각품을 통한 새로운 세계
예술적 치유로 우리를 위로”

“‘낯선 자’라는 건 엄밀히 타인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감상자는 각자의 ‘낯선 자’를 만들어내고 또 만나게 되죠. 내게는 ‘또 다른 나’였어요. 예술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깨닫는 ‘나’ 말이에요.”
한국 1세대 추상 조각가로 60년 넘게 조형 예술의 길을 걸어온 엄태정(87) 작가는 22일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신작 ‘낯선 자의 은신처’ 연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갤러리 1층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리는 이 작품은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거대한 은빛 원통형 구조물이다. 정면에 나란히 세워진 세 개의 원통 ‘낯선 자의 은신처-은빛 베일 출현 Ⅰ, 출현 Ⅱ, 출현 Ⅲ’을 가만 보고 있자니, 사람의 형상이다. 나, 너, 우리. 조금 떨어진 곳엔 3.5m에 달하는 ‘낯선 자의 은신처-티탄의 은빛 베일-철인은 하늘을 걷는다’가 어느 사찰의 고고한 탑처럼 서 있다.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구조물, 즉 ‘은신처’ 안은 어떤 모습일까. 텅 비었을까, 가득 차 있을까. 각자의 ‘낯선 자’를 탐색하는 감상자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간다. 엄 작가는 이 순간을 두고,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세계는 세계화한다”고 명명했다. 6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고 했다”면서 “하나의 조각이 세워지면 그 속에 내재한 마법 같은 힘이 기존 공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꾼다”고 설명했다. “그때 우리를 위로하는 예술적 치유가 일어나지요.”

전시는 조각, 회화, 드로잉 등 총 27점을 선보인다. ‘은신처’ 시리즈뿐만 아니라 갤러리 지하 1층에서는 BC 4세기에 대거 제작된 수행의 장소이자, 불교 예술의 정수 ‘막고굴’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도 공개됐다. 구리로 작업한 ‘1000개의 찬란한 막고굴 시대 Ⅰ·Ⅱ’이다. 20여 년 전 이종상 조각가와 함께 둔황(敦煌) 지역에서 보았던 막고굴의 감명을 내내 품고 있다가 이제야 조각으로 완성했다. 엄 작가는 “막고굴의 네모난 형태는 하나의 우주이고 당시 수행자들의 은신처였다”고 했다. 이 조각은 직육면체를 이어 붙이고, 각 면에 다시 네모난 ‘굴’을 뚫었다. 단순한 형태지만 감상자를 머물게 한다. ‘보는 자’에서 ‘들여다보는 자’로 나아가게 하는 것. 이에 대해 엄 작가는 “예술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신비로움’”이라고 강조했다. “아는 게 아니라 깨닫게 하는 것이죠. 요즘엔 그런 감상이 드물어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1990년대 집중적으로 작업한 ‘청동-기(器)-시대’ 연작 일부도 오랜만에 출품됐다. 신작 ‘막고굴’ 연작과 한 공간에 배치된 ‘과거 조각’은 작가의 작업이 변모·확장한 시기를 상기시킨다. 그는 “너무 가득 차 있었다. 순수한 예술적 욕망보다 ‘잘 하고 싶다’는 욕구가 앞섰다”고 돌아봤다. “지식과 이성의 예술에서 깨달음의 예술로 나아가던 시기였어요.”
초기엔 강렬한 철 조각을 주로 선보였던 엄 작가는 점차 재료의 전환을 꾀한다. 부드러운 물성을 지닌 구리가 철을 대신하게 됐고, 이윽고 알루미늄에 정착해 이른바 ‘시적인 조각’을 추구하게 된다.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알루미늄을 통해 ‘비어 있으나 차 있는’ 상태를 구현할 수 있었고, 이것이 ‘엄태정 조각’을 규정하게 된다.

전시에선 드로잉과 회화도 만나볼 수 있다. 그에게 평면 작업은 사유의 도구이면서 조각 탐구의 출발점이다. 특히, 작가가 가장 존경하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의 대표작 ‘무한주’를 연상시키는 두 점의 회화가 눈길을 끈다. ‘만다라-하늘-무한주’와 ‘만다라-법열-무한주’. 가로·세로 1㎝ 크기 정사각형 2만여 개를 한땀 한땀 그려 넣었으니, ‘수행’에 가깝다. 그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며 “정신적 스승 브랑쿠시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고 했다.
속도와 효율성이 미덕이 돼버린 디지털 시대, 그 대척점에 굳건히 서서 ‘물성의 예술’에 복무하는 작가. 그는 “기술로 폭력을 가하는 시대를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각자의 은신처 즉, 진중한 사색의 공간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조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감성, 직관, 상상에 더욱 절박해져야 해요. 예술로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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