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보은 특사’, 헤이그 열사가 본다면

지난 14일은 이준(1859~1907) 열사 순국 118주기였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에선 이틀 앞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광복 80주년, 기념관 개관 30주년을 함께 기념했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헤이그 특사 사건’은 많은 사람들 기억에 실패한 외교 사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특사단장 이상설(36), 부단장 이준(48), 통역관 이위종(23)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 실패마저 후세를 위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생각이 든다.
1907년 6월 15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막했다. 열흘 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단은 정식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당시 초청받은 47국 중 하나였음에도 의장국 러시아 등이 일본의 방해 공작에 호응했다. 하지만 특사단은 을사늑약(1905)의 부당성을 알리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고 장외 여론전에 착수했다. 6월 27일 자 ‘평화화의보’에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라는 항의문이 게재된다.
7월 5일 자 같은 신문 톱으로 특사단 세 명의 사진이 실렸다. 영어·불어·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의 인터뷰도 보도됐다. 기자는 ‘일본은 강대국이고, 이미 그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런 활동이 무슨 의미냐’는 투로 묻는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생 나이의 이위종의 대답은 청년다웠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은 유령, 정의는 겉치레, 기독교 신앙은 위선에 불과하다. 왜 총칼만이 유일한 법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느냐.”
반향이 커지자 헤이그 외신 기자단은 7월 9일 특사단과 간담회를 가진다. 이위종은 불어로 “을사늑약은 뒤통수를 치는 강도보다 더 비열한 짓”이라며, “2000만 한국인이 하나 되어 일본에 맞설 것”이라고 했다. 이 연설은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신보‘, 미국 ’디 인디펜던트‘, 뉴질랜드 ’오아마루 메일‘ 등 각국 신문에 상세히 보도됐다.
헤이그 특사 기록을 살펴본 이유는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보은 특사’ 논란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정부 출범 직후 미·일·중·러 4국에 특사를 파견했던 관례를 깨고 14국으로 범위를 넓혔다. 하지만 특사단장은 대부분 이 대통령 선대위원장을 맡은 인물들이다. 미국 특사로 내정됐던 야당 원로는 논란 끝에 교체됐다. 영국·프랑스 특사단은 정상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했다. 이상설·이위종 열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압박을 받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사형 또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죽을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2025년 현재 국제 질서의 비정함은 118년 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집권 세력은 국내 대선 승리에 도취됐는지 특사 파견을 ‘포상 휴가’쯤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타향에서 생명과 젊음을 바친 열사들이 본다면 뭐라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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