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모란이 피기’...김영랑은 이육사 같은 항일 시인이었다. [강진 김영랑 생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단 날
떨어져 누운 꽃잎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강진 출신 김영랑 시인. 국어 시간에 모국어의 가장 정제된 언어로 갈고 닦은,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라고 배웠다.'북 소월, 남 영랑'이라 했던가. 영랑은 토속어를 사용해 남도의 정서를 살리고, 그윽한 운율로 우리말 시어의 격을 드높였다.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라며 영랑의 언어를 옥처럼 투명하고 맑은 미학으로 평가했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생가는 늘 붐빈다.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찾는 문학의 명소다. 초가와 마당, 대나무와 감나무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다. (영랑 생가는 당초 기와집) 낮은 지붕 아래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가 이어지는 고택은 남도의 전통가옥 구조를 그대로 간직한다.
7월의 뜨거운 바람도, 담장을 타고 흐르는 짱장한 햇살도, 영랑의 시구 마냥 '도른도른'하다. 꽃 봉오리채 담장에 내려 앉은 능소화가 시인인 듯 하다. 문득 무용가 최승희가 떠오른다.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었으니…. 혼담까지 오간 그와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대구형무소에서 만난 영랑
대구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다. 이곳에서 2천386명의 서훈 독립운동가가 투옥됐다. 이들 중 216명은 옥중 순국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195명) 보다 많은 인원이다.
대구감옥과 형무소에서 한말 호남의병장, 광주 3·1만세운동 주모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들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그곳에 2심격인 복심법원이 있었기 때문에, 2심 형이 확정되면 형무소에 투옥됐다.
이 항일의 혼, 대구형무소 역사관 입구에 김영랑이 서 있다. 역사관은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주요인물 5인으로 이육사, 장진홍, 박상진, 이종암 그리고 김영랑을 내세운다.
"김영랑 시인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역사관에서 영랑을 만난 첫마디는 그랬다. 만석꾼 아들로, 당대를 뒤흔든 화려한 러브스토리, 간질거리는 모국어로 노래한 여린 서정, 그 영랑이란 말인가, 역사관 전시물을 한참 쳐다보았다.
대구형무소 역사관은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기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고 기술했다.
#온 몸으로 저항한 항일 시인 영랑
영랑(본명 김윤식)은 1903년 전남 강진군 군내면(강진읍)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강진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이후 서울로 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왔다. 3월 23일 강진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김성수 등과 함께 강진 일대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각자 2원씩을 거둬 태극기 500개를 제작키로 했다.
시위를 도모하던 중 별도의 만세투쟁을 준비중이던 김안식을 만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김윤식은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불복해,대구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이 때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김윤식은 앞서 14살이던 1917년 종로 한 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어린 학생의 치기는 아니었다. 일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영랑은 3·1운동 후 옥고를 치르고 일본 유학길을 떠났다. 아오야마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는 청년들과 교유하며 사상적 지평을 넓혀 나갔다. 특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과의 인연은 그의 의식 세계에 깊은 자극을 주었다.

독(毒)을 차고
아직 아무도 해(害)안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毒)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혼(魂)건지기 위하여

#일제 저항 시인 7인.. 시와 시대 한몸
1930년 무렵 영랑은 저항적 색채가 짙은 시들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시로는 '독을 차고', '거문고', '가야금' 등이었다. 그는 '독(毒)을 차고'에서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라고 일제의 억압을 맹수에 빗댔다.
영랑은 맹수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고 말한다. 일제와 맞서려는 결연한 의지였다. 작품'거문고'에서는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로 친일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거의 모든 문인들이 변절과 전향을 했어도 그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아예 붓을 꺾어 버렸다. 1940년 '춘향'을 마지막으로 해방될 때까지 단 한 줄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김선기 문학평론가(전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장)는 "김영랑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를 썼지만, 누구보다 강직한 정신과 품격 있는 삶을 살았다"면서 "친일의 길을 거부하고, 단 한 줄의 일본어 문장도 쓰지 않으며 침묵으로 맞섰던 그의 모습은 민족의 자존이었다"고 평했다.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임종국 선생은 '일제 저항 시인 7인으로 윤동주, 변영로, 김영랑, 이희승, 황석우, 이승기, 오상순'을 적시했다.
그는 시인이면서 식민지 조국에 눈감지 않은 항일 독립투사였다. 시와 시대, 언어와 민족이 한 몸이었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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