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 '삼별초'가 남해군에 주둔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고려는 몽골을 상대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8년간, 무려 9차례에 걸쳐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기나긴 전쟁에서 삼별초는 최후까지 항쟁을 주도하며 고려 최강의 부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삼별초가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지가 남해군에서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
남해군에서 삼별초의 유적이 발견된 것은 기존에 알려진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잇는 서해안 루트에서 남해안으로 그 범위가 확장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 유적지
◇삼별초는?
삼별초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우(미상~1249)가 1219년 설립한 야별초에서 출발했다.
초기에는 야간의 치안 유지 등을 담당했지만 몽골과 전쟁 기간 좌별초와 우별초로 규모가 커졌다. 별초는 정예부대를 뜻한다.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이 가세하면서 3개의 부대가 합쳐진 삼별초라는 특수한 부대가 탄생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인 동시에 정규군의 역할을 대신해 몽골과의 전쟁을 수행했다.
1259년 고려는 몽골과 화친을 맺었지만, 이후 10여 년간 원래의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무신정권이 여전히 몽골에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1270년 몽골과의 항쟁을 주도했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고려는 그해 5월 강화도를 떠나 40여 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를 한다.
하지만 환도를 반대했던 삼별초와 고려 정부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마침내 고려 정부는 환도 이후 삼별초의 해산명령과 그들의 군적 명단을 회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크게 반발한 삼별초는 한 달여 뒤인 1270년 6월 강화도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왕족인 왕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 장군 배중손을 중심으로 봉기 3일 만에 1000여 척의 선단을 꾸려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향했다.
진도에 용장성을 구축한 삼별초는 고려의 정통 정부를 자처하며 서해안의 주요 도서지역과 거제, 동래, 제주에 이르는 남해의 해상로를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삼별초가 내륙인 전주와 나주 공략까지 시도하자 놀란 고려와 몽골은 연합군을 결성했다.
여러 번의 전투에서 삼별초가 승리를 거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열세에 놓이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삼별초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연합전선 구축을 모색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동안 착실히 수군 증강에 나선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마침내 1271년 5월 진도를 함락시켰다.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지휘부 상당수가 전사하고 잔존 병력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간신히 제주도로 탈출했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항파두리성을 구축하고 1272년 다시 남해안 일대에서 조운선을 탈취하고, 몽골의 일본정벌 전초기지인 합포(마산)를 공격해 전함 수십 척을 불태우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이에 고려와 몽골은 1만여 명의 병력으로 1273년 4월 제주도에 상륙해 삼별초의 마지막 거점인 항파두리성을 함락했다. 3년여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삼별초 유적 갈림길
발굴조사 당시 현장.
◇구전으로 전해오던 '대장군지'
남해군에는 '대장군지'에 관한 구전설화가 전해져 온다. 지금의 남해군 서면 서호리 망운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대장군지'는 '옛날 이곳에 살았던 장군이 도술을 부려 부채로 이 앞을 지나는 조공선을 불러 약탈을 일삼자, 조정에서 군사를 풀어 그를 잡으려 하였다'라는 이야기가 유래되고 있다.
고려말의 문신 정이오(1351~1434)는 '망운산 아래에 돛배 바람 바라보니, 동서로 오가는 배가 통행한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대장군지에 대해서는 '옛날 장군이 살았다. 그 장군이 조공선을 부채로 부쳐 들여 벼를 막 약탈하기에 나라에서 군대를 풀어 그를 잡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삼별초가 남해안의 해상로를 장악해 조운선을 탈취했다는 당시의 기록과 맞물려 대장군지에 대한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1270년 삼별초는 진도에 정부를 세우고 남해안의 남해, 창선, 거제, 합포 등지를 차례로 점거했다. 당시 남해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조운의 중심지이자 남해안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삼별초는 진도를 중심으로 여러 도서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해안 지역의 여러 고을을 기반으로 대몽항쟁을 지속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해군은 국내에서 제주도, 거제시, 진도, 강화도에 이어 5번째로 큰 섬이다. 섬의 크기는 진도, 강화도와 엇비슷한 규모로 진도와 함께 서남해안을 장악하기 위한 핵심 거점이다.
남해군은 지난 2002년과 2004년 지표조사를 통해 해당 부지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2019년에 진행된 정밀 조사에서 여러 문헌 기록 등을 바탕으로 대몽항쟁 근거지로 판단했다. 이어 2024년 발굴 조사에서 대몽항쟁 시기의 1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와 문양 기와, 연꽃무늬, 막새기와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현장 발굴 조사를 통해 대장군지는 석벽과 여러 단으로 쌓은 축대, 건물이 있었던 부지, 담장, 출입로와 계단의 존재, 배수구 등의 구조물이 확인됐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만으로 대장군지의 성격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더욱 면밀한 추가적인 전면 발굴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이다.
삼별초 비
◇남해 삼별초를 이끈 대장군 유존혁
지난해 12월 5일 남해군에서 개최된 국제학술 세미나에서는 대장군지가 삼별초 유적으로 강하게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연구가 발표돼 주목받았다.
황철주 삼한문화유산연구원은 세미나에서 "2024년에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유적의 구조와 시기 등이 삼별초의 주둔지일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즉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던 전설이 사실을 기초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용혁 국립공주대 명예교수는 "대장군지에서 발견된 유적은 성터는 아니고, 건물을 짓기 위해서 경사면에 몇 단의 축대를 쌓은 것"이라면서 "발굴 유물의 시기가 삼별초의 항쟁 시기와 겹치고, 축조 방식이 진도의 용장성과 비슷해서 유존혁이 남해에서 거점으로 삼았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남해에 주둔한 삼별초는 대장군 유존혁이 이끄는 부대였다. 고려사에는 '유존혁은 남해현을 거점으로 하면서 연해 지역을 노략질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유존혁의 부대는 어느 정도의 규모였을까? 1271년 5월 진도가 함락되자 유존혁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남해를 떠나 제주도의 삼별초에 합류했다.
고려사에는 '유존혁이 80여 척의 배를 이끌고 탐라(제주)로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 명예교수는 당시의 함선 규모를 고려해 1척당 승선 인원을 30명으로 가정할 경우, 많게는 3000여 명 남짓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30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했다면 그 수는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그만큼 삼별초가 남해군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명진·김윤관기자 sunpower@gnnews.co.kr
윤용혁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남해 삼별초, 새롭게 조명해야 "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
윤용혁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는 삼별초 거점인 남해군의 유적과 유존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별초의 역사는 진도는 용장성과 배중손, 제주도는 항파두리성과 김통정이라고 한다면, 남해는 대장군지와 유존혁으로 대표되고 있다.
일찍부터 남해군은 진도, 거제도와 함께 남해 연안의 3대 거점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유존혁은 강화도에서 삼별초가 봉기할 때, 좌승선으로 추대된 핵심 지휘부 중 한 명이다.
윤 교수는 "지휘상으로는 유존혁이 배중손보다 높다. 그런 유존혁이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남해에 주둔한 것은 그만큼 남해가 지닌 중요도가 크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유존혁에 대한 기록은 남해를 떠나고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1273년 제주가 고려몽골연합군에 함락당할 때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윤 교수는 "대장군지가 삼별초의 항쟁 시기의 유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 시기의 유적이라는 것은 확인됐기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유적들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더욱 정밀한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대장경 판각지, 노량대첩 등과 함께 남해군의 대표 유적지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