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흥망성쇠가 나를 당겨 앉힌다
어제 그 수녀복 한 벌이 베란다 바닥에 떨어져 있다
개화 삼십팔일 만에 이승의 끈을 놓아버린
흑갈색 꽃술을 내밀고 손바닥에 놓인 꽃
실오라기 꽃대에 인간사가 다 실린다
때 되면 솟아올라 피울 것은 다 피우던
꽃들의 흥망성쇠가 나를 당겨 앉힌다
꽃은 꽃의 길, 사람은 사람의 길
막바지 이르러서도 갈래갈래 헤매던 길
부릅뜬 물음표 하나가 한 달 넘게 버티며
저토록 이승의 끈은 꽃들에게도 질긴 거!
미연소 까만 숯덩이, 가슴 속의 까만 흉터
한 달째 거꾸로 매달려 타던 속을 보인다
철창에 갇혀 살아도 철창 밖을 넘나드는
떨어져 죽어서도 하늘 향해 가슴을 내민
오늘밤 너의 유언이 꽃보다도 고왔다
숨 멎은 꽃을 두고 한 달 여 함께 마르다
"싹뚝" 꽃대를 따서 책갈피에 뉘었던 밤
세 자매 코고는 소리를 꿈길 너머 들었다.
/2010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우리 현대시조문학사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난초」에서는 혼탁한 세속과 물질적 욕심에서 벗어난 고결한 정신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나의 화분 속의 난초에서는 향기도 없었고, 꽃이 진 후에 열매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종자번식의 숙명을 포기하면서도 꽃을 피워야 하는 난초의 속내를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래서 "저토록 이승의 끈은 꽃들에게도 질긴 거!/미연소 까만 숯덩이, 가슴속의 까만 흉터/한 달째 거꾸로 매달려 타던 속을 보인다"하며 38일간의 꽃의 쓰라림을 헤아렸습니다. "무정란無精卵 하나를 품고 행복한 듯 웃던 그대" 등등 고결한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내면을 「난의 소등」이라는 제목으로 32수首의 장시조를 썼던 것입니다. 가람의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라는 고결함은 있었지만, 가장 소중한 인간적인 낱말…, 즉 '사랑'이 빠져있었습니다. 이처럼 난초 하나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도 일종의 세상 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난의 소등」을 마치고, 매사 합리화시키려는, 일테면 정신승리자 같은 말버릇 하나가 생겼습니다, "그래그래, 그게 바로 세상의 본모습이야!"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