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함안 산인 고려동유적지
고려왕조 충절 다짐한 두문동 72인 중 이오 선생
남쪽 함안으로 내려와 '고려 유민 마을' 세워 정착
후손들, 조선왕조에 출사 않고 600년 자급자족
충절 상징하는 붉은 꽃 배롱나무 명소로 이름나

"조선왕조 땅에 묘비를 세울 때 나라를 잊은 백성이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 나의 이름은 물론 글자 한 자 새기지 마라."
함안군에는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바친 고려동 유적지가 있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에 반발해 남쪽의 함안으로 내려간 이오 선생은 죽을 때까지 북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고려왕조 유민임을 강조하며 거듭되는 조선왕조의 출사요구를 거절하고, 고려동 밖 조선에서 생산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얼 쓰겠냐며 내가 죽으면 묘비에 글자 한 자 새기지 말라는 '백비(白碑)' 유언을 남겼고, 후손들은 그대로 행했다.
백비를 세우게 한 선생의 정신은 선비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고려동은 600여 년 동안 함안 사람들의 충절의 표상이요, 청렴을 실천하는 현장이 되고 있다.

◇고려왕조에 충절 바친 고려동 유적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를 지낸 이오 선생은 황해도 재령 이씨로 성균관 진사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가 있었다. 세속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의 문하에 있으면서 학문이 깊어 당시의 학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떨쳤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송도의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에 절의를 다짐한 72인 중 한 사람인 선생은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함안에 정착했다.
그가 정착한 고려동은 자양산이 동쪽으로 뻗은 능선 남쪽 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오랫동안 '장내'라 불렸으나 2020년 5월 마을 이름을 '고려동'으로 바꾸었다.
고려동 주변에는 유목정고분군, 문암산성과 유물산포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생은 거처를 정하고 이후 후손들이 모여 살아왔다. 선생은 고려동 배롱나무 아래에 집터를 잡은 후 북쪽에 대나무를 심어 조선을 바라보지도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드러냈다.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비석을 세워 놓고 논과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했다.
그는 아들에게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했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후손들은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고려전답 9만9000㎡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으나 건물들은 한국전쟁에 대부분 소실된 이후 복원했다.

◇경남도 기념물 지정 보호
7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 충절을 상징하는 화려한 꽃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고려동 유적지는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고려동 유적지 입구에는 높이 8m, 둘레 1.3m의 보호수 배롱나무 꽃이 100일 동안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자태에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을 경남도는 1982년 8월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고려에 대한 절개를 끝까지 지킨 유학자인 이오 선생의 부부 묘역도 경상남도 기념물로 2024년 지정됐다
묘역은 179㎡ 면적에 묘 2기, 묘비 1개, 문인석과 무인석 각 1개 등을 갖추고 있다.
선생의 묘는 고려동에서 직선거리 7㎞가량 떨어진 함안군 가야읍 혈곡리에 부인 의령남씨 묘와 함께 있다. 경남도는 해당 유적의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해 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고려왕조에 대한 선생의 충절을 보여주는 백비(白碑)는 가야읍 혈곡리 37∼1 야산에 있다. 묘소 앞에는 높이 95㎝, 너비 40㎝, 두께 15㎝의 비석이다.
글자는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은 백비(白碑·글 없는 비석)다.
선생은 조부가 공민왕의 사위였고 귀족 집안의 자손임에도 권력과 부귀영화를 일평생 바라지 않은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함안 지역민들과 공무원들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 청렴과 충절의 상징인 이오 선생을 기리고 묘소에 참배하고 있다.

◇자미정(紫薇亭), 퇴계선생길 등 유적
고려동 유적지에 있는 자미정은 휴식 공간이다. 조선 순조 33년에 창건하고 고종 15년에 중건했으나 한국전쟁에 불타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고려동 담장 옆 배롱나무에 피는 자미화는 고려에 대한 단심을 보여주는 충절을 상징하는 꽃이 되고 있다. 자미화는 무덤을 만들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이오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 뒤 말라죽었으나 30여 만에 다시 고목에서 싹이 나왔다고 한다.
담장안에 판 우물인 복정은 모곡리 580번지에 있다. 선생의 한 현손의 처가 전복을 먹고 싶다는 시모의 말씀에 백방으로 전북을 구하려 다녔다. 하지만 산골에 구할 길이 없었는데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효심에 감동해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복정은 전복의 복자와 우물 정자를 써 전복이 나온 우물이라고 알려졌으며, 아무리 큰 가뭄이 들었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효산정은 조선 고종 때 부자지간의 도리를 논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려 이로 인해 귀양을 간 효산 이수형 선생이 10여년에 만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곳으로 이곳에서 후배 양성에 힘을 썼다.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이 보낸 편지를 모은 백운래흥첩이 전해진다.
1533년 퇴계 이황이 고려동 삼우대를 방문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퇴계선생길이 있다. 함안의 아름다운 11길 중 하나로 선조들의 옛 자취를 만나볼 수 있다.
충절을 상징하는 붉은 배롱나무 꽃과 관광두레 자원봉사자들이 300m에 달하는 모곡 1길 담장에 각양각색의 동물벽화 그림을 그려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여선동기자 sundong@gnnews.co.kr



Copyright © 경남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