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 탈출구’ 대학은 툭하면 휴교…도망자 김민기를 숨겨줬다
2화 젊음의 아지트, 화실에서 만난 사람</span>


일찌감치 고도근시가 된 내 눈 얘기를 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바로 중학교(경기도 이천 양정여중) 2학년 때 미술을 담당했던 김현숙(1944~ ) 선생님이다. 수업 시간에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아 찡그리고 보고 필기도 제대로 못하던 나를 눈여겨봤는지 어느 날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눈이 나쁜데 왜 안경을 안 쓰니?”
“할머니가 못 쓰게 해요.”
“뭐라고? 왜?”
“여자가 무슨 안경이냐고, 여자는 안경 쓰면 안 된대요.”
때는 1967년이었고 그런 얘기가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다. 약간 놀란 듯한 선생님이 말했다.
“요즘에는 콘택트렌즈라는 것이 나왔어. 그건 안경이 아니고 눈동자에다 렌즈를 붙이는 거라 안경을 안 써도 잘 볼 수 있어.”
평일엔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주말이면 부모님 댁이 있는 서울로 가는 선생님은 서울 종로1가에 있던 공안과에 나를 데려갔다. 나는 난생처음 서울 나들이를 선생님 덕분에 할 수 있었고, 콘택트렌즈라는 신문물까지 접하게 되었다. 진료 뒤 처방받은 콘택트렌즈를 끼고 거리로 나와 보니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길가 가로수의 나뭇잎까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보이던 그 풍경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왜 현모양처가 돼야 하지?
그런데 선생님은 다음해에 학교를 떠났고, 나는 이천에서 고등학교까지 진학해 1972년 2월 양정여고를 졸업했다. 당시는 여자가 대학을 간다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진학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지낸 덕분이기도 했고, 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것도 대학 진학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였다.
당시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 모두 현모양처를 꿈꾸며 신부수업을 하는 것이 대세였다. 여자는 너무 많이 배워도 안 되고 지나치게 잘나지도 말아야 했다. 결혼 적령기도 여자는 스물두세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의심했다. 인구의 절반이 여자인데 어떻게 모두 현모양처를 꿈꾸느냐는 것이 내 의심의 요지였다. 남자들은 자기 개성대로 다양한 직업을 꿈꾸는데 여자들은 왜 모두 똑같이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학 상담을 하던 선생님은 나에게 서강대학교 진학을 권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도 다니고, 가수 양희은도 다니는 좋은 대학이라며 추천을 한 것이다. 당시 서강대학은 예비고사 합격 뒤 치르는 본고사에서 국어, 영어, 수학 세과목 외에 사회, 역사, 지리 세과목과 물리, 화학, 생물 세과목까지 전 과목 시험 체제로 필기시험만 이틀을 치렀다. 그런데 독어독문과는 과학 세과목 대신 독일어 한과목만 시험을 치렀다. 수학, 과학 같은 이과 과목에 약했던 나는 독문과로 들어갈 것을 정하고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배우던 독일어를 공부해 서강대 독문과에 입학했다.
내가 독문과를 들어간 데는 당시 문학소녀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독일 문학 서적들도 한몫을 했다. 경기도 이천에서 책이 주는 간접 경험의 세계 속에 파묻혀 살던 당시의 나에게 서울은 동경의 장소였고 대학 진학은 꿈의 실현이었다.

화실에 ‘밍기형’을 숨겨주다
대학에 입학해 서울로 온 나에게 또 다른 선물은 김현숙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이었다. 선생님은 당시 을지로 4가에 있던 세운상가 아파트에서 화실을 하고 있었다. 당시 29살이었던 선생님은 여자 혼자 사는 집(화실)에 남자들이 여럿 드나드는 것이 남들 눈에 어찌 비칠지 몰라 걱정이라며, 집을 떠나 온 나에게 화실에 들어와 같이 살 것을 제안했다. 때는 1973년이었고 나는 선생님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여 화실살이가 시작되었다.
화실에는 처음에는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만 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을 배우는 이들의 친구들까지 드나드는 젊음의 아지트가 되었다. 초기엔 선생님이 같이 등산을 다니던 경기고 산악반 모임인 ‘라테르네’ 사람들이 많이 왔다. 매일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면 화실 가득 사람들이 모여 앉아 기타 치고 노래하거나 술을 마시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하여튼 매일이 파티였다.
남편 박수헌을 처음 만난 곳도 화실이었다. 2학년이었던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그는 다른 대학에 다녔는데 그림을 배우는 친구 최명철을 따라 왔다가 화실 식구가 되어 버렸다. 화실 식구가 된 사람들은 그 외에도 미대생이었던 김다애와 이애자, 음대생이었던 김미선 같은 여학생들도 있었다. 나와 같은 과에 다녔던 단짝 친구 류종숙도 나를 따라 와서 화실 멤버가 되었다. 우린 모두 대학생이라는 공통분모로 순수하게 같이 어울렸다. 당시 화실 친구들과는 나이가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평생을 같이한 친구 사이가 되어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화실 친구들 덕분에 다른 청춘들과 유사한 20대를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대학을 다녔던 1970년대는 매 학기 시위가 벌어져 학기 끝까지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1학년이었던 1972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해 10월17일인가 학교에 갔더니 교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안에는 집총한 군인들과 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살림(?)을 차린 군인들이 있었다. 정말 학교 주인이 뒤바뀐 기이한 풍경이었다. 이후에도 해마다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이 생겨서 우리 세대 상당수는 공부나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세상사와 음악에 심취한 대학 생활을 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건 아니었다. 1974년 12월,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터졌을 때 화실에서도 모금을 해서 격려 문구와 함께 광고를 싣기도 했다.
화실에는 우리 같은 평범한 대학생들 말고 유명인들도 드나들었다. 대학 1년 선배이던 가수 양희은도 왔고, 당시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가수이자 작곡가 김민기도 왔었다. 양희은이나 김민기는 내 여고 시절의 우상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동경해마지않던 존재였는데 바로 그들을 만나 한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시고 토론도 하면서 가까운 친구처럼 이야길 나누는 것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화실에 와 있었다. 그래서 양희은이나 김민기가 누구와 어떤 인연으로 화실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화실 주인인 김현숙 선생님의 인맥으로 왔을 것이라 추측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밍기형’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김민기는 우리같이 마음 편히 지내던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화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밍기형이 집에 못 들어가고 피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곧바로 화실에 숨어 있으라고 제안했다. 밍기형에게 내 방에서 자라고 말하고 나는 선생님과 함께 자자고 했다. 그렇게 밍기형은 내 방에서 사흘 밤을 숨어 있었다. 그 사흘 동안에 나는 밍기형한테 ‘바다’라는 노래를 배웠다. 그리고 나중에 어떤 자리에서든 노래할 기회가 생기면 나는 작곡가한테 직접 배운 노래라고 자랑을 하며 ‘바다’를 부르곤 했다. 도피 중인 밍기형에게 노래를 배우던 그때의 나는, 6년 뒤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연루돼 또다시 남자를 숨겨줬다가 감옥에 가고 직장도 쫓겨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어두운 밤바다에 바람이 불면/ 저 멀리 한바다에 불빛 가물거린다/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물결은 사납게 출렁거리는데/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그 누가 탄 배일까 외로운 저 배/ 그 누굴 기다리는 여윈 손길인가/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불빛은 아련히 가물거리는데/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김민기, ‘바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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