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현대미술 관통하는 ‘조형정신’ 읽어냈던 컬렉터

1980년대 서울 인사동 골목, 아침에 나타났다가 저녁이면 사라지는 이동 이발관이 있었다. 이발 기구 담은 보스턴 가방을 멘 이발사는 전날 저녁 가게 한구석에 맡겨놓은 거울을 찾아다 골목의 시멘트 담벼락에 걸어놓고 손님을 맞았다.
지난달 23일 세상을 떠난 원화랑 전 대표 정기용(1932~2025)은 당시 3천원 하던 이발료가 1천원으로 해결되는 싸구려 노상 이발관의 단골이었다. 자가용이 없어 버스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서울 시내는 주로 걸어 다녔다. 도시의 산책자, 보들레르 풍의 플라뇌르(산책자)였다.
서울대 불문과 출신인 정기용은 고품격의 프랑스어로 유럽을 누비면서 세계적인 화상, 작가들과 교유를 맺었다. 프랑스 현대미술운동 ‘쉬포르 쉬르파스’의 작가 클로드 비알라(1936~)와 잘 맞았다. 남프랑스 님므의 투우박물관장이기도 했던 비알라는 서울에 오면 정기용과 함께 장안평 골동품 상가를 다니며 워낭, 코뚜레 등을 사곤 했다.
고교생 시절부터 이미 고미술 컬렉터였던 그는 생전 수집품을 두고 말하곤 했다. “이게 옛날 옛적 골동품으로 보이지만 당대에는 최첨단의 현대미술이었어.”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관통하며 면면히 흐르는 조형정신을 읽을 수 있어야만 인류의 끈질긴 욕망인 미술의 정체가 비로소 보인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대기업 회사원 시절, 회장의 지시로 미국 뉴욕 출장 때마다 김환기(1913~1974)를 만나 후원했다. 김환기를 보며 현대미술에 눈을 떴고 화랑을 열 것을 결심했다. 김환기 부인인 김향안의 신뢰를 얻어 뉴욕에 있는 김환기의 작품들을 서울에 소개했다. 나중에는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의 개관에 큰 힘을 보태었다.
1983년, 프랑스 파리에 있던 작가 김창렬의 아파트에서 백남준, 정기용, 정상화, 박명자 등이 모였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고 김창렬이 박연폭포를 불렀다. 정기용은 춤을 추었다. 1984년 정초에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 등과 위성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백남준이 호소했다. 정기용이 세 사람의 판화를 다량 사주어 자금 부족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1984년 2월, 백남준을 비롯한 이들 판화 3인전이 원화랑에서 열렸다. 백남준의 미술작품이 국내에 전시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길, 4층 건물의 2층에 원화랑이 있었다. 전시공간이라 해봐야 10평(약 33㎡) 남짓. 당대 최고 갤러리스트가 운영하는 화랑이라 하기엔 공간이 초라했다. 거기다 자신을 드러내길 저어했기에 미술인들 사이에서 아는 이가 드물었다. 정기용을 안다면 그는 이미 미술계 핵심을 꿰뚫은 사람이었다.
인천을 대표하는 미식가로 ‘먹는 재미 사는 재미’라는 저서를 남긴 의학박사 신태범(1912~2001)이 청년 정기용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인천 미식 문화의 유전자가 정기용에게로 전해졌다. 와인에 조예가 깊어 웬만한 소믈리에를 능가했는데 우리나라 전통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시금치 한단을 사더라도 경동시장에서 발품을 팔아 최상의 물건을 적절한 가격으로 구하는 걸 보람으로 삼았다. 그에게는 좋은 그림 하나를 발견하는 일과 좋은 시금치 한단을 구하는 일이 다르지 않았다. 좋은 그림이 나타나면 집을 몇채 팔아서라도 구입했다. 화상이라기보다는 컬렉터에 더 가까웠다.
말년에는 은거에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젊은 날을 함께 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는 게 낙이었다. 벽에 걸린 뷔라글리오(1939~)의 작품 속 푸른색 유리를 노경의 시간이 통과했다. 지나온 시간은 미세한 가루로 부서져 맑고 투명한 허공이 되었다. 정기용 선생님은 홀가분하게 그 허공마저 넘어가는 품위 있는 죽음에 이르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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