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의 대풍헌] 여름, 마음 온도를 낮추는 법

한여름의 열기는 피부뿐 아니라 마음마저 거칠게 만든다. 숨 막히는 더위는 쉽게 짜증을 유발하고, 말과 태도에 날을 세운다. 극한의 폭우에 이어 이제 살인적 폭염이 시작된다. 이런 날씨에는 사소한 말 한마디가 깊은 오해로 번지고, 작은 실수도 큰 잘못처럼 과장되기 쉽다. 겨울이 온기가 필요한 계절이라면, 여름은 관대함이 절실한 계절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싶어 한다.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다. 문제는 그 관대함이 자신에게만 향하고, 타인의 허물에는 유독 엄격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남의 실수를 날카롭게 들추며 일종의 정의감이나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정의로운 행동인지, 아니면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공격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일은 드물다. 몰리에르의 희곡 '타르튀프'가 떠오른다. 위선적인 신자 타르튀프는 겉으로는 겸손과 경건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 타인의 잘못은 심판하면서 자신의 욕망은 신의 뜻으로 포장하는 그의 모습은 현실 속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태도는 자기방어이자 은밀한 공격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도 유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혁명을 이끈 돼지들은 평등과 정의를 외치며 출발했지만, 곧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지배자가 된다. 지도자 나폴레옹은 남의 실수는 가혹하게 벌하면서, 자신과 측근들의 허물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덮는다. 그는 진실을 조작하고, 과거의 동지 스노볼을 적으로 몰아세운다. 타인에게는 냉정하면서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도덕적 이중성 전형이다. 동물 농장의 몰락은 진실이 사라지고 감시와 고발만 남은 사회가 맞이한 필연이다. 이러한 위선적 행태는 우리 정치권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정치권은 자신의 실수나 허점에는 관대하면서, 상대의 잘못은 끝까지 파고들며 비판한다. 정의를 위한 비판이라기보다 권력을 잡고 지키기 위해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과열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런 행태는 국민 인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정치인의 언행을 보며,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묵시적 허용을 받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타인에게는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자신에게는 무뎌질 수 있다. 오웰은 묻는다. 진정한 정의는 어디에 존재하며, 정의를 내세운 힘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세상의 많은 갈등과 상처는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될 것을 드러내는 데서 비롯된다. 진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강박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 나다니엘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에서 주인공은 숲에서 환영을 통해 존경하던 이들의 숨겨진 실체를 본다. 그날 이후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하고, 세상은 오직 흑백의 이분법으로만 보이게 된다. 이 작품은 '진실의 과잉'이 신뢰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을 드러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더 큰 자비이고, 감싸주는 일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다. 물론 그 침묵이 부정이나 회피가 아닌, 타인을 위한 배려이자 신중한 선택일 때 그렇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잠시 품을 것인지, 그 균형을 가늠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살만한 사회란 무균의 플라스크 같은 곳이 아니다. 실수와 사소한 잘못을 품어줄 여백이 있어야 한다. 타인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자신에게는 조금 더 엄격해지려는 자세. 그 균형 잡힌 시각이 자신과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마음마저 지치는 여름, 우리는 무엇을 포용해야 하고, 무엇을 직시해야 하는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늘 옳은 것은 아니며, 모든 어둠이 악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덮어주는 사랑이 더 깊은 연민과 배려일 때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은, 불완전함을 견디고 이해하려는 따뜻한 시선이다. 그런 삶의 태도가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힘이다. 마음 온도를 낮추면 세상은 더 시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