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8) 진덕여왕의 정치

강시일 기자 2025. 7. 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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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두 번째 여왕 당나라 힘 빌려 백제와 고구려 견제하다 김춘추에게 왕위 이양으로 삼국통일 기틀 마련
경주 현곡면 오류리의 구릉에 위치한 신라 28대 진덕여왕릉.

신라 28대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의 딸이자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선덕여왕에 이어 성골 여성왕으로 추대해 왕위에 올랐다.

진덕여왕은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김춘추를 중심으로 귀족들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는 인사정책을 펴는 한편 백제와 고구려 등의 외세에 대응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굴욕적인 외교를 외교를 택하기도 했다. 이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춘추는 군사를 빌리는 일에 성공하고, 관제와 관복을 당나라의 복식에 따르기로 하고 돌아왔다.

절대적인 무력을 가졌던 김유신 장군을 압독군주로 명해 백제의 침략을 봉쇄하는 역할을 맡기고,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내 군사를 지원받아 고구려 등의 외세침략으로부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는 정책을 펼쳤다. 여왕은 재위 7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김춘추에게 왕위를 넘겨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진덕여왕릉 정남쪽 방향의 말 신상.

◆신화전설: 진덕여왕의 정치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이다. 아버지는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진덕여왕은 외모가 수려하고 아름다우며 팔을 내리면 무릎까지 닿았다.

진덕여왕은 즉위하면서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김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는 등으로 안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한편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외교와 국방의 중책을 맡겼다.

진덕여왕이 재임하던 647년부터 654년 7년 동안은 백제와 고구려 등의 외세침략전쟁이 잦았다. 이 때문에 진덕여왕은 김춘추를 외교관으로 파견해 중국 당나라의 군사원조를 청하면서 많은 당나라의 문화유물을 받아들여야 했다.

승만이 왕위에 올라 친히 태평가를 지어 비단을 짜서 태평가로 무늬를 놓아 춘추의 아들 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이것을 당나라에 가져다 바쳤다. 당나라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포상하며 계림국왕으로 고쳐 봉하기도 했다.
진덕여왕릉 진입로의 소나무숲길.

진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받친 태평가의 글은 "위대한 당나라가 왕업을 열었으니/ 높디높은 황제 포부 창성하리라.…(중략)… 황제는 충성스런 어진 인재 등용하네./ 5제 3황 닦은 덕이 하나로 이루어져/ 우리 당나라 황실 밝게 비추리"와 같이 당 황제를 칭송하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이때 김춘추가 중국 황실로 들어가 "신라는 천조를 섬겨온지 오래되었는데, 백제가 국토를 침략해 여러 성을 빼앗아 입조할 길이 막혔다"면서 "천자께서 군사를 빌려주신다면 흉악한 적을 물리치고 조공을 바칠 수 있다"고 군사를 빌려줄 것을 청했다.

당 태종이 이에 군사를 내어 도와줄 것을 허락했다. 그러자 김춘추는 한 발 더 나아가 신라 왕궁의 의복제도를 중국의 제도로 고칠 것을 청하니 태종은 귀한 의복을 꺼내어 김춘추에게 주면서 벼슬까지 내렸다.

김춘추는 또 "신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는데 원컨대 한 아들을 천자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숙위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해 그의 아들을 당나라에 남겨두었다. 이후 춘추의 아들 김인문은 평생 당나라에 머물면서 외교관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고초를 겪기도 하다가 결국 당나라에서 죽음을 맞았다.
진덕여왕릉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진입로.

이에 앞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오자 진덕여왕은 김유신을 내세워 이들을 막게 했다. 김유신은 불리한 전세에서 퇴각하려 할 때 장군의 아들이 뛰어나가 적들과 싸우다 전사하자 신라군사들이 분기탱천해 싸움에 임해 전세를 뒤집고 크게 이겼다.

진덕여왕은 김유신이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백제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자 많은 칭찬을 하고 포상을 내렸다.

진덕여왕은 651년부터 당나라의 예법을 차용해 새해를 맞아 백관들이 왕에 대해 인사를 행하는 정조하례제를 실시했다. 이를 두고 현대의 신년교례회의 효시라는 해석도 있다.

진덕여왕 시절에 나라의 중요한 일은 남산의 북쪽 오지암, 지금의 도당산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만장일치로 의견을 채택하는 화백제도가 이때 본격 시행되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채택하지 않는 화백제도였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의 제도로 신라가 일찍부터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해석이다.

신라시대 화백회의는 주로 네 곳의 영지에서 이루어졌다. 네 영지 중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이고,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이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남쪽 오지산이 지금의 남산으로 해석된다.
진덕여왕 당시 화백회의가 열렸던 곳. 남산 오지암으로 추정되는 곳에 설치한 화백정.

◆흔적: 진덕여왕릉

신라 28대 진덕여왕의 릉은 경주 현곡면 오류리의 낮은 산허리에 아담하게 조성돼 있다. 소나무 숲이 호위하듯 사방을 빙 둘러쳐 있고 릉은 남쪽을 향해 따뜻한 자리에 앉아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진덕여왕릉으로 비정한 것을 1960년대에 문화유산청이 그대로 사적지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왕릉은 12지신상을 새긴 호석들을 12개의 탱석 사이에 세워 통일신라 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2지신상의 조각은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등의 호석보다는 다소 얇게 조각했다. 신상의 크기도 비교적 작게 조성했다. 12시를 가리키는 말과 쥐의 신상은 정면을 바라보게 조각하고, 오른쪽의 신상은 오른쪽으로, 왼쪽의 신상들은 모두 왼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무복에 지물을 든 수호신으로 조각했다. 난간의 설치 흔적은 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석도 없다. 왕릉 앞의 축대와 진입로는 최근에 조성했다.

삼국사기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 사량부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사량부는 지금의 내남면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어 릉의 위치를 보아서도 진덕여왕의 릉으로 보기 어렵다. 또 릉의 축조 형식의 변화를 보아도 진덕여왕이 사망할 당시보다 한참 뒤인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여서 현재의 릉을 진덕여왕의 무덤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화백정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월성 전경.

◆스토리텔링: 여왕의 사랑

진덕여왕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풍만한 자태로 외모가 아주 아름다웠다. 손을 내리면 무릎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다르게 진덕여왕은 남성을 가까이에 두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마음에 둔 남자가 있었지만 그가 다른 길을 걸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멀리서 그를 흠모하면서 죽을 때까지 따로 정을 두지 않았다.

죽지랑과 자장율사는 가정을 갖기 이전부터 그들의 부친들이 나라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짝을 지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여왕은 번번이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전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춘추는 진덕여왕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모이자 한참 나이가 많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김유신 장군을 은근히 부추겨 부부의 연을 맺어보라고 떠밀었다. 그러나 유신 또한 아예 접근할 여지를 내어주지 않는 단호한 여왕의 태도를 보고 진작 시도조차 하려하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마음에 두고 혼자 사랑앓이를 했던 남자는 다름 아닌 원효대사였다. 원효가 화랑이었던 시절, 전쟁터에서 주검이 된 요석공주의 남편을 떠메고 들어와 넘겨주고 돌아서 훌훌 떠나가던 모습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버렸다.
진덕여왕이 원효대사에게 심중을 고백하는 장면을 인공지능 AI가 그린 그림.

그 이후 승만공주는 원효와의 만남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좀체 기회가 닿지 않아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원효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승려가 되어 산천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한 소식을 접한 공주는 더더욱 애타는 마음을 숨겨가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나이가 들어 여왕으로 즉위하고 어느덧 국사의 위치에까지 성장한 원효대사를 궁에서 만나게 됐다. 여왕은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 가며 원효대사에게 국사를 의논하고, 그냥 보내기를 여러 차례 하다 기어코 따로 찻자리를 마련했다.

어렵게 여왕은 말문을 열어 마음을 전했다. "제 곁에서 국사를 직접 경영하면서 나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함을 에둘러 전했다.

원효는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저는 이미 불가의 몸이 되어 부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어 여왕폐하와는 가는 길이 다르옵니다"라며 용서를 구하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표표히 떠나가는 원효의 넓은 등짝을 보며 여왕은 달려가 매달리고도 싶었지만 애써 용상의 팔걸이에 힘을 가하며 마음을 가누었다. 진덕여왕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김춘추가 김유신의 강력한 추천으로 왕위를 잇고 삼국통일의 길을 열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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