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 배신하지 않을 사법부의 길 [세상읽기]


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군부독재는 사법이 완성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을 때 그 위헌, 위법성을 선언하여 통제하는 것, 그것이 법치주의의 핵심이고 사법의 역할인데 판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민의 피와 땀으로 독재가 종식된 후 사법개혁의 핵심은 ‘사법타도’가 아니라 ‘사법독립’이 되었다. 사법을 믿은 까닭이다. 독재로부터 시민을 지키지 못한 사법을 믿어준 이유가 무엇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났던 판사들의 자성 노력 때문 아니었을까.
판사들이 처음부터 수그렸던 것은 아니다. 각종 시국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거나 적어도 권력이 원하는 만큼의 재판을 하지는 않은 적이 빈번했다. 이에 정권은 칼을 빼들었다. 당시 판사들은 재판 관련 출장을 가면 당사자로부터 출장비를 받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검찰이 그 관행을 뇌물로 구성하여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다. 중단되어야 마땅한 관행이고 법리적으로도 뇌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법과 정권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시국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던 판사가 다시 시국사건 재판을 맡게 되자 그 판사를 상대로 그전까지 한번도 문제 삼지 않았던 사안에 대해 선별적이고 전격적으로 수사를 개시한 것은 의도가 명백했다. 판사들은 이를 ‘정권의 사법 길들이기’로 규정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전체 판사 중 3분의 1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1971년에 일어난 ‘1차 사법파동’은 결국 무마되었고,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판사들의 임명권을 손아귀에 쥐었다. 사법은 이를 시점으로 암흑기에 들어간다.
독재 시절에도 모든 판사가 침묵하진 않았다. 간간이 판사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서 박시환, 조수현 판사 등이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장은 이들을 보호하는 대신 징계성 지방 전보 조치를 내렸다. 정권의 입장에서 사법을 굴복시킬 때, 판사 전부를 하나하나 통제하기보다 판사에 대한 강력한 인사권을 쥔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당사자인 판사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전두환 시기의 대법원장을 다시 대법원장으로 임용하려는 시도가 발생하자 판사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반발했다. ‘2차 사법파동’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재에 저항했던 대법관 이일규가 대법원장으로 임명된다.
판사들은 문민정부가 등장하자 사법개혁의 방향을 ‘사법부 내부로부터의 재판독립’으로 틀었다.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의 재판에 대한 직접적인 외압은 사라졌지만,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 아래 판사들이 승진 경쟁을 위해 대법원장·법원장의 의중에 따라 재판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재판독립이 저해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판사가 사법행정권자의 지시·의도에 따라 재판을 하게 되는 ‘사법 관료화’를 경계했다. 이에 대해 판사들의 내부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고 냉소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2008년 법원장이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신속히 처벌하기 위해 사건 배당 및 재판 속행 등에 관한 지시를 하는 등 재판 개입을 하는 사례가 발생했고, 2017년에는 사법행정권이 정권과 결탁하여 광범위한 재판 협의 및 개입, 판사 통제를 시도한 일(사법농단)이 밝혀졌으니, 판사들의 우려는 옳았다. 정권이 총칼 대신 대법원장 등을 회유하여 사법행정권에 의한 재판 개입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위 사례들은 사법 관료화를 방지하여 사법부 내부로부터의 재판독립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권에 의한 사법 통제를 막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당시 논의되던 사법개혁 방법으로는 대법원장 인사권 분산,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 사법행정권의 재판 개입 금지(사무분담위원회 활성화, 자동배당제도), 판사회의 활성화 등이 있다.
판사들이 사법부의 흑역사를 거치면서 갖게 된 사법개혁의 최대 목표는 재판독립이다. 판사들은 이를 위해 대통령에게든 대법원장에게든 강력히 항의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조직을 비판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는 태도에서 시민도 미우나 고우나 사법부를 신뢰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사법개혁의 논의가 다음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판사들이 정권과 조직으로부터 독립하여 재판할 경우, 그 재판이 주권자의 총의인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재판이 될 것이라는 점은 어떻게 담보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나오고 있다. 사법이 독립하다 못해 주권자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이자, ‘사법의 민주적 책임성’에 대한 요청이다. 아무래도 법원 내에서는 재판독립에 비해 사법의 민주적 책임성에 대한 논의는 소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법의 민주적 책임성은 재판독립만큼이나 사법부 존재의 명분이 되는 가치다. 이에 대해 판사들이 치열하게 논의하고 자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럴 때 시민은 사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함께 설 공간을 열어줄 것이다.
사법농단이 밝혀진 즈음, 조직의 보위를 위해 재판을 수단화하고 재판독립을 스스로 무너뜨린 사법부가 어떻게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칼럼 연재를 시작했다. 질문과 고민은 여전하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법이 해야 할 고민을 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 시민은 사법을 존중해 주었다. 여기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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