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4. 조선왕릉 광릉

하인수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2025. 7. 2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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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후에도 넘치는 위압감…세조 수양대군이 남긴 권력의 상징
광릉 정자각(궁능유적본부)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태종 이방원과 수양대군을 일컬어 연산군과 더불어 가장 잔인한 왕들이라고 한다. 3대 태종 이방원은 조선 개국 공신들인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숙번 등을 죽이거나 족쇄로 묶었고, 이복형제인 방번과 방석을 제거하였고, 2차 왕자의 난에서 형들마저 족쇄를 채웠다. 즉위 후에는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 등 4형제도 가차 없이 죽였다. 7대 세조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이 즉위한 후 김종서와 동생 안평대군이 역모를 획책했다고 죽이는 등 정치적 야심을 보인다. 불안한 단종은 즉위 3년 2개월 만에 살기 위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살에 상왕이 된다. 왕위를 물려받은 수양대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단종 복위 운동을 빌미로 역적의 누명을 씌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내고 6개월 후 단종을 죽인다. 그리고 단종 복위를 위해 역모를 했다는 죄명으로 순흥(현 영주시)부사 이보흠과 순흥에 유배 중인 동생 금성대군도 죽인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형제 둘을 죽이는 골육상쟁이었다.
진입공간과 홍살문
 광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회격묘(灰隔墓)이다. 세조가 5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아들 예종은 생전 자기가 죽으면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石室)과 석곽(石槨)을 마련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에 따라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회격으로 릉을 조성하라고 명을 내린다.(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9월 19일) 회격(灰隔)이란 관(棺)을 광중(壙中)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石灰)로 메워서 다지는 묘 조성 방법이다. 광릉 이전(以前)의 조선왕릉은 모두 석실묘이다. 대신들은 석실은 무엇보다 견고하고, 릉 안에 명기(明器), 복완(服玩) 등의 물건을 간직하기가 쉽고, 바닥돌[底石]이 없으므로 지기가 오르내릴 수 있고, 석실에 바닥돌이 없으므로 물이 새어 수기(水氣)가 머물러 모이지 않으며, 나무뿌리가 들어오는 것과 벌레와 개미의 구멍을 막기 쉽다며 석실을 주장한다. 예종은 노역을 줄여서 백성의 민폐(民弊)를 없애고 검소함을 생각한 선왕(先王)의 고귀한 뜻을 어길 수 없다며 석실묘 대신 노역이 적은 회격으로 결정한다. 이후 조선왕릉은 석실묘에서 회격묘로 바뀐다.
세조릉에서 보는 왕후릉
회격묘로 결정한 후 택지를 위해 여러 곳을 조사한다. 정인지(鄭麟趾) 등을 세종의 영릉(英陵)로 보냈지만 근방에는 쓸 만한 땅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성남시에 위치한 둔촌 이집의 아들인 이지직(李之直) 분영(墳塋)이 능침에 적당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이 친히 거동하여 보려고 하자 밀성군 이침(李琛), 영순군 이부(李溥), 영의정 이준(李浚) 등이 풍양(豐壤)에서 돌아와 정흠지(鄭欽之)의 분영이 산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능침에 매우 합당하다고 한다. 이에 예종은 신숙주(申叔舟) 등을 보내어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신숙주는 정흠지(鄭欽之)의 분영(墳塋)이 매우 좋아서 이지직(李之直)의 분영보다 좋은데 단지 오른쪽 팔뚝이 좁고 주혈(主穴)이 기울어져서 흠이라고 하였다. 예종은 정인지 등을 다시 보내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정인지는 정흠지의 묘 밑에 유견(兪堅)의 묘가 있는데, 그 혈(穴)이 매우 좋아서, 신의 소견으로는 이 산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 신숙주는 유견의 무덤을 보니 쓸 수가 없고 정흠지의 묘터는 능침으로 매우 합당하다. 그리고 정흠지 묘는 주혈(主穴)이 단정치 못한 것이 흠이 될 만하나 상지관(相地官)들이 보토(補土)하면 쓸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정인지도 반박을 한다. 정흠지 묘터는 청룡(靑龍) 밖에 봉선사천이 청룡 등을 지고 흐르고, 주혈(主穴)이 기울었으며, 또 돌이 많기 때문에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예종은 산릉은 이미 내가 정하였다며 정흠지 분영(墳塋)으로 정한다. 헌인릉 인근 성남의 이지직묘에 관심을 두다가, 풍양(현 양주) 정흠지 묘 아래 위치한 유견의 묘터를 생각하다가, 정창손의 아버지 정흠지 묫자리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묫자리를 빼앗겨 조부모(祖父母), 부모, 동생 묘를 옮기게 된 집현전 학사이자 조선조 청백리 218인에 선정된 정창손에게는 관과 곽(棺槨) 각각 8개, 유둔(油芚) 8부(部), 종이 1백 권, 쌀과 콩 1백 석을 내려 주고,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여 묘(墓)를 조성할 군인(軍人) 50명을 뽑아서 주게 하였다.
재실

 조선왕릉은 신비감과 엄숙함이 있지만 세조의 광릉은 신비함과 엄숙함보다 위엄이 넘치고 위압감마저 든다. 세조의 묘터로 결정된 뒤부터 광릉 주변은 조선시대부터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을 심어 엄격하게 보호하여 왔다. 이러한 보호 숲이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약 500ha(150만 평)에 국립수목원인 광릉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 세조는 죽어서도 가장 넓은 땅을 가진 것이다. 광릉은 동원이강릉으로 두 개의 언덕에 세조 능과 정희왕후 능이 있다. 두 언덕 사이는 마치 왕의 능과 왕후 능을 갈라놓듯 작은 하천에 물이 흐르면서  작은 골이 만들어졌다. 골이 파여 주변에는 너덜 바위 형태의 바위가 흉하게 돌출되어 있다. 언덕[岡]은 조선왕릉 중에 가장 높은 데다가 두 릉 사이의 돌출된 바위로 인해 감히 접근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이다. 돌출된 바위들은 검고 탁하여 서기를 띠는 길사(吉砂)가 아니라 박환이 덜 된 흉사(凶砂)이다. 세조 수양대군의 광릉은 죽어서조차 엄숙하고 경건한 환경이 아니라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공간을 가져 민초와 왕실을 위협했던 생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